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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교회는 공동체신학을 기초로 한다.

1. 공동체신학은 교회의 본질을 추구한다.
2. 공동체신학은 코이노니아에 근거한다.
3. 공동체는 이 시대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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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공동체신학은 교회의 본질을 추구한다.

1) 공동체라는 표현은 교회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라는 관심에서부터, 교회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인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라는
구체적인 질문을 포함하여, 교회를 어떻게 개혁 또는 갱신할 것인가? 라는 다짐에 이르기까지 그 생각의 중심이 교회에 있다.
대개의 경우, 공동체를 말하는 개인이나 교회들은 교회를 중요하게 인식하고 또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2) 공동체라는 표현은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는 의미이다.

공동체라는 표현에는 교회에 대한 신학적인 정리보다,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는 처음 교회는 어떤 것인가? 역사에서 드러난 교회의
모습보다는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처음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는 교회 본질에 대한 관심과 이러한 것들을 찾아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3)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보이는 모형(sample)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복음서 마가복음 1장 1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선언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함을 모두 복음이라 규정하고 있다.
(막1:14-15)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복음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가르치심과 행함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었다.
예를 들어, 교훈집이라고도 부르는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처음 메시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마4:7),
그 후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계속 가르치시며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신다.(마 5장-7장, 13장, 25장) 그리고, 부활 후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행1:3)

그런데, 마태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계속 가르치시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둔 싯점에서 교회의 설립을
약속하셨다.(마 16:18) 마태복음의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교회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복음서의 유일한 곳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계속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로 일관되게 표현하시던 예수님께서 중요한 싯점에서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 대신에 '교회'라는 단어를 대신 사용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하도록 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배려로서,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보이는 견본이요, 교회의 본질이 곧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의미한다.

4) 공동체라는 표현은 교회에 대한 고백이다.

즉 교회를 단순히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교회를 고백하는 표현이다. 공동체를 말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터전이라고 믿는다. 가지가 줄기에 붙어있어야 하는 것처럼(요 15:1-10),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교회적인 삶에 충실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급받아 믿음이 보호받고,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으나, 교회적인 삶에서 떠나면 줄기를 떠난 가지처럼 그리스도의 생명이 끊어지는 영적인 삶의 터전으로 고백한다. 또, 교회는
세상의 역사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어부가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 그물을
치듯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교회를 두시고 그 교회 안에 사람을 모으시고 교회를 확장하시며 구원사를 이루어 가신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역사 속에서 구원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이다.(엡1:9-10) 결국, 교회는 개인이나 사회,
인류적으로 모든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약속하시면서 그 교회에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말씀하셨다.(마 16:19) 신약성경의 유일한 역사서인 사도행전의 메시지는 세상의 역사에서 박해와 순교를 받는 교회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말한다. 비록 지하 공동묘지에서 모이는 교회일지라도,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연합하여 사는
삶을 고백하는 성찬식이 있는 교회가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답이었다.

이상과 같이, 교회가 바로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공동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교회에 대한 교회론적인 생각,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는 입장, 그리고 교회에 대한 실제적인 고백의 특성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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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공동체신학은 코이노니아에 근거한다.

1) 교회의 본래적인 삶은 코이노니아이다.

교회의 본질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실제로 이루시고, 사람들이 경험하고 참여할 수 있는
교회의 본래적인 삶은 어떤 것일까? 신약성경에는 교회를 지칭하고 소개하는 단어들이 여러개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교회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로 가장 많이 쓰이고, 또 정확한 대표적인 단어는 코이노니아'이다. 신약성경에는 코이노니아라는 명사가 19회,
다른 형태까지 합하면 모두 38회,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는 단어들까지 합하면 100회 이상 사용되었다.
코이노니아는 본래 헬라어에서 단순히 친교, 교제의 의미를 갖는 단어이었으나, 기독교에서 사용하면서 함축적인 깊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코이노니아는 신약성경에서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한글 개역성경에도 다양한 단어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 사용한 코이노니아를 우리말로 번역하기는 매우 어렵다.

신약성경에서 사용한 코이노니아를 모두 찾아 분석하면 크게 네가지 의미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친교, 교제, 사귐의 의미. 둘째로, 소속과 참여의 의미. 셋째로, 화해, 일치, 연합, 그리고 하나의 의미. 넷째로, 공급과
나눔의 의미이다. 그러나, 그 외에도 '동정한다' '경륜', '교통' 등의 특별한 경우들도 있다. 분명한 것은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단어라는 점과 코이노니아는 조직이나 건물을 의미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결과로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삶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2) 코이노니아는 공동체적인 삶을 말한다.

신약성경의 코이노니아를 우리말로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으나,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의미들을 종합하면, 코이노니아는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동체적인 삶'을 의미한다. 여기에 '공동체'를 말하는 신학적인 근거가 있다. 기독교적인 공동체의 의미,
교회에서 말하는 '공동체'의 의미를 정확하게 말하면,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공동체적인 삶은 두 가지 삶의 내용, 혹은 삶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하나됨을 지향하는 삶과 삶을 나누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공식으로 정리하여 표현하면,

코이노니아=공동체적인 삶(하나됨을 지향+삶을 나누는 과정) 이다.

하나됨을 지향하는 삶이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차이, 인종과 국가, 문화와 종교, 성별과 나이, 직업과 신분, 학력과
빈부, 신앙의 경력과 색깔, 그리고 이러한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담을 그리스도안에서 극복하여 마음과 삶이 하나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삶을 말한다. 삶을 나누는 과정이란, 하나되기 위해 그리스도안에서, 자리와 역할, 마음과 물질, 생각과 경험, 그리고 인격과
삶을 나누는 기회들을 갖는 삶의 과정을 말한다.

3) 신약성경의 증언

사도행전 2:42-48. 사도행전 2장에 소개되는 교회는 기독교 최초의 교회로 아직 때묻지 않고 순수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예루살렘 교회가 있으므로 오늘의 전 세계의 교회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교회는 많은 숫자가 모이는 교회도 아니었고,
크고 화려한 건물을 가지고 있는 교회도 아니었고, 체계를 갖춘 조직이 있는 교회도 아니었다. 다만 교회의 교회다운 모습,
코이노니아의 삶이 있다. 사도행전 2:42-48의 내용을 분석하여 보면 코이노니아=공동체적인 삶(하나됨을 지향+삶을 나누는 과정)의
공식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내용이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각각 하나됨을 지향하는 단어가 소개되고 이어 삶을 나누는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 42절에서, '서로'라는 하나됨을 지향하는 단어에 이어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에 힘쓰는, '삶을 나누는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 43-45절에서는, '다함께'라는 말에 이어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나누는 내용이 소개된다. 46절에서는,
마음을 '같이'라는 단어에 이어 자리를 나누고, 떡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는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

고린도후서 13:13. 고후13:13은 오늘날 교회에서 축도문으로 인용하는 내용이다. 물론, 바울이 처음부터 축도문으로 사용하도록
기록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축도문으로 쓰게 된 것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복을 기원하는 바울의 기원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지하는 최선의 방법, 그리고 완벽한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는 아덴에서 낙심하여 고린도로 간 바울이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의 도움을 받아 어느 곳 보다도 성령의 역사가 충만한 가운데 세운 교회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고린도
교회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교회였으며,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고린도교회가
많은 문제를 갖게 되었고,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에 대해 답을 교훈하는 편지로 고린도전서를 썼다. 그리고, 많은 문제를 갖게
된 고린도교회는 지도자인 바울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겨 바울과 고린도교회는 매우 불편한 관계에 이르게 되었다. 바울에게는
매우 상처가 되었고 마음 아픈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 모든 문제가 정리되었을 때,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면서 고린도교회에
위로의 편지인 고린도후서(후반부)를 쓰게 되었다. 이 위로의 편지 끝에 바울은 붓을 놓기 전에 최대의 복을 기원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라고 하였다.

왜 바울은 성령 하나님의 복은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기원하였을까? '교통'의 원어는 코이노니아이다.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기원한 것이다. 그것은 성령이 충만한 고린도교회가 많은 문제를 갖게 된 것은, 성령의 충만이 개인의 은사에 머물렀고 교회적인
삶에 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바울이 이후에는 교회의 교회적인 삶인 코이노니아가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교회의 본래적인 삶이 성령의 코이노니아인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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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동체는 이시대의 메세지다

1993년 8월 2일부터 14일까지 스페인의 산디아고에서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제1분과에서 주최하는 제5차 세계대회가 열렸다.
이 모임은 정기적인 모임은아니었으나,필요에따라비정기적으로 모이는 중요한 모임이었다. 당시의 세계는,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소련도 붕괴된 직후로, 사람들은 곧 세계평화가 이루어 질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이념이라는 장치에 의해
유지되던 질서가 무너지자 세계는 중심을 잃고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지역과 인종간의 전쟁은 더 많아졌고, 지구촌의 기아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각해졌다. 또한 환경문제가 대두되고, 무역마찰과 문화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상황을
맞으며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가?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살아 계시다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향해 무엇을
전해야 하는가?... 세계대회는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다. 그런데, 그 모임의
주제가 '신앙과 생활과 증거로부터 코이노니아를 지향하여'였다. 주제가 의미하는 것은, 이제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이 자기 중심적
이고 기복적인 신앙으로부터, 사회구원을 위해 행동만을 강조하는 것으로부터, 구원받은 자로서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선교로부터,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문제의 답으로 주신 교회, 그 교회의 본래 모습인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교회로 돌아서야 한다는 뜻이다.
'공동체' 즉,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세계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미 주신 답을 우리가
보여 주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곧 교회가 교회의 본래적인 모습인 코이노니아의 삶을 보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47의 후반에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기록되었다. 나가서
전하는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 찾아 온 사람들이 코이노니아의 삶을 보고 복음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확인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이 사도행전 2장의 처음 교회처럼 산다면, 왜 사회와 세계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교회가 답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얼마 전까지 과학문명의 발달과 경제성장 등으로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으면서 그 어느 때 보다, 인간의 비인간화,
인간상실, 그리고 인간소외의 문제에 부딪혔다. 또 최근에는 국제 통화기금시대를 맞아 실업과 좌절의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념에 의한 민족의 분단과 아픔, 갈등의 문제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채 여전히 남아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살아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역의 큰 방향을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교회'로 삼아, 교회를 개혁하고 갱신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답을 교회가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