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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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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류기석 작성일08-07-28 15:18 조회2,11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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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인터넷신문 당당뉴스(http://www.dangdangnews.com)에 올렸던 칼럼을
선교기행에 관심을 가져주신 사랑방교회 지체들을 위해 옮깁니다.

몽골에서 \"길\"을 묻다.
잃어버렸던 얼굴들이 살고 있었네!

입력 : 2008년 07월 23일 (수) 16:46:30 [조회수 : 375] 류기석yoogiseo@yonsei.ac.kr

오래된 문명을 찾아 몽골로 ...


▲ 고비허브인 백리향, 몽골은 야생의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고진다.


몽골은 맑고 푸른 초원의 나라 그래서 몽골사람들의 시력은 평균5.0(?)이란다. 쪽빛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나라, 한가로이 풀을 뜯는 염소와 양떼들 그리고 소떼와 야크들, 말과 낙타가 공존하는 녹색의 지상낙원 이미지가 그려지는 나라다.

하지만 몽골인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더 이상 유목생활의 궁핍하고 고단한 삶을 영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유목민(우리와 같은 농촌과 농업인)들은 하루가 다르게 고통과 아픔 속에서 지난한 가난을 넘기고 있으며, 사회체제는 오랫동안 외부세력에 의한 공산화와 사회주의가 종식되는가 싶더니 이제는 급속한 자본주의식 개혁개방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문제는 먹고사는 경제였다.


▲ 올해로 창립15주년을 맞는 울란바타르대학교는 몽골에서 한국학, 가정학에서 독보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정보통신과 경영학 분야에서 높은 결실을 맺고 있고, 200만평의 실습 농장을 조성함으로 축산과 임학분야에서도 착실하게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그야말로 살아 꿈틀대면서 세계사를 주름잡았던 몽골의 역사적 자긍심은 어디에도 없이 사라지고 민주주의와 여성문제, 국제사회(NGO)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나라로 전락한 것이다. 지금 역사의 질곡에 몸부림치는 이들에게 대도시인 울란바타르는 한줄기 광명과도 같은 곳이다.

하지만 도시의 급속한 팽창과 더불어 빈곤과 부패의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이젠 더 이상 유목민의 삶을 지탱시켜줄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도 없다. 몽골은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자원빈국에 속한다. 몽골은 이렇다 할 유전과 천연가스도 없고, 지정학적 중요성도 그다지 크지도 않아 지금껏 거대자본이나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작게나마 민주화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 이번 몽골답사에서는 연세CT연구단(설용건 단장)과 울란바타르대학교(윤순재 총장)간 상호협력을 위한 기본합의(MOU)를 체결했다.


하지만, 최근의 국제원자재 가격의 급등으로 몽골에 대한 관심이 이전보다 높은 것이 사실이다. 캐나다 등 외국자본과의 합작으로 인한 유전개발 결과에 따라 몽골 민주화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 6월 27일부터 7월4일까지 제3세계 환경선교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몽골답사를 떠났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의 관심은 단연 몽골 초원에 피어있는 자생적인 야생화였다. 다음날 일찌감치 울란바타르대학교 농과대학 교수와 학생들이 시장을 보고하여 함께 시내에서 2시간 남짓의 거리에 있는 바트 숨베르 실습농장 2,000만평을 향해 달렸다.


▲ 울란바타르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들과 학생들이 2박3일간 바트 숨베르농장에 머물면서 자생식물조사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광활한 연두 빛 초원에 머물면서 고비지역의 사막화 녹화는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우선적으로 실시하는 것과 현재의 염소와 양 위주 축산정책의 방향전환, 한계농업지역에 대한 적정한 시설농업여부, 자연농업, 에너지농업을 생각했다. 감자를 대체할 수 있는 전분류를 생산 액체연료를 얻고, 기름나무나 추위에 강한 유채를 재배하여 바이오디젤을 생산하고, 차시랑과 고비부추 등 몽골의 자생식물을 이용한 정유생산도 우리의 관심 대상이다.

또한 기독교환경운동연대의 “만원의 행복-사막에 푸른 꿈을” 몽골에 심어주기 위한 아름다운 녹색프로젝트의 꿈도 아울러 가지고 갔다. 급속히 사막이 증가하고 있는 현재, 지구의 1/4이 사막이며, 2100년엔 지구의 절반이 사막이 될 것이란다. 사막화의 원인은 무분별한 산림벌채와 수자원 이용, 과도한 경작, 방대한 축산, 지구온난화로 인한 지형성 가뭄과 이상기후 등이다.


▲ 몽골의 얼굴, 울란바타르대학교 실습농장에서 해맑은 농대 남학생들을 사진에 담았다.


특별히 몽골 중부 ‘바트 숨베르’ 2천만평의 농과대학 실습농장에서 한그루의 나무심기는 지구온난화 억제와 사막화 방지뿐만이 아닌 각 교회가 테마가 있는 생태 숲으로 조성, 한국의 귀농자와 몽골의 유목민이 함께 정착하는 생태마을을 건설하면 좋을 것이다. 더 나아가 탈북자들의 사회주의권 안에서의 정착촌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에 기독교환경운동연대의 새로운 환경선교에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런 기회의 땅에 전기나 물, 도로와 같은 SOC시설은 태부족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식으로 무턱대고 일을 저질렀다가는 100%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천천히 이들에 맞는 기술과 조건으로 접근하면 좋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몽골의 자생식물 중 백리향의 자생군락지를 발견하여 채집을 할 수 있었고, 추출결과도 0.5%의 수율이 나와 경제성이 있었다.

앞으로 이곳에는 자연농업대학으로 자원생물학과나 자연농업과를 두어 자연농업과 생명‧환경교육과 적정기술 중심의 연구가 이루어져 창의적인 축산과 농업이 연계된 생태산업과 특수한 농작물(곡물)과 과수의 재배, 향기식물의 산업화육성 등을 이루었으면 한다. 이밖에도 출판과 도서관, 생태관광, 이벤트, 치즈가공, 식물성 생약발견으로 특화시켜나갔으면 한다.


▲ 울란바타르대학교 실습농장은 무려 2,000만평이나 된다.


동아시아문명의 원조는 고조선, 고구려, 발해?

흔히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반도사관)와 만주(만주사관)에 국한시켜 해석하였던 것을 남과 북을 넘어 만주와 연해주, 중국내륙, 몽골과 러시아 이르쿠츠크(바이칼)까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제껏 좁은 틀에 익숙해진 사관을 깨거나 조금이라도 벗어날라치면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유난스러워진다.

그러기에 제대로 된 우리의 강역의 역사를 한번만이라도 폭넓게 바라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는 수십 년 이상 기존 역사학계가 만들어온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이자 뒤짚는 것으로서 조심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흐른다. 그동안 국수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며 재야사학으로 치부해버리거나 폄하당하기 일쑤인 한국의 역사적 가치만큼이나 몽골의 역사도 광복되어야 함을 느끼면서 함께 새로운 지평을 넓혀 나갔으면 한다.


▲ 몽골에 가게되면 마지막 황제가 머물렀다는 겨울궁전을 꼭 방전하기 바란다.



▲ 몽골의 국립역사박물관에서 만난 암각화가 시선을 끈다.


부여와 고구려, 몽골이 파생되어 나온 바로 그 고리국의 백성들로 칭기즈칸이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의 부리야트족들은 바이칼 일대를 코리(고구려족 또는 고리국의 구성원)족의 발원지로 보고 있으며 부리야트족의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이동하여 만주 부여족의 조상이 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믿고 있다.

봉우사상연구소 정재승님은 동몽골이나 바이칼 지역에서는 상식적인 전설이라고 한다. 이들은 동명왕을 코리족 출신의 고구려칸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1995년 8월 손보기님은 동몽골 다리강가 지역에서 고구려식 무덤과 성곽을 찾아내어 몽골의 원류와 고구려와의 연속성을 확인했다. 이 같은 정체성이 같기에 몽골인들은 한국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경향신문에서 기획시리즈 코리안루트를 찾아서의 기사를 보니 러시아 연해주~바이칼호~만주와 중국 동북부~발해연안까지 1만km를 달려 한민족의 시원을 찾았다고 한다. 특히 연해주 체르냐치노 유적은 수천 년 동안 끊길 듯 하면서도 우리 역사의 명맥을 이어온 유적들이라는 것에 가슴이 뭉클했다.

특히 \"랴오허문명이 중국 문명의 기원\"이라지만 중국의 궈다순(郭大順)에 의하면 “랴오허문명은 고대문화의 생장점이자 다민족 문화의 거대한 멜팅점”이란다. 그는 이 지역이 고조선과 고구려, 부여 등 우리 민족은 물론 선비, 거란, 말갈 등 서로 피를 나눴거나 이웃으로 지냈던 고조선의 후계들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무대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무대는 랴오허 유역뿐 아니라 중국의 허베이성, 랴오닝성, 네이멍구(內蒙古)자치주,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물론 중국의 산둥반도, 그리고 한반도까지를 포함한다고 한다.

따라서 \'랴오허문명\'은 중국학계도 \"상나라 이전의 문화는 발해만에 있다(先商文化在渤海灣)\"(궈다순)고 분명히 못 박고 있듯이 “랴오허문명”은 곧 \'발해문명\'이다.


▲ 몽골의 국립자연사박물관에는 특별히 화석과 운석, 각종 보석류들과 공룡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고구려사와 직결된 발해사는 엄연한 우리의 역사다. 백제가 망하면서 고구려도 멸망하는 과정에서 당나라나 신라가 고구려 땅을 전부 통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는 부족장의 형태로 통치한 것으로 보이며, 이당시 고구려 왕족과 귀족들 30만 명이 당나라로 끌려갔고, 이무렵 대중상은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 후고구려를 창건하고 대중상이 죽으면서 대조영이 진국으로 돌아와 대진으로 국호를 삼았다. 대진은 발해로 국호를 바꾸면서 228년간이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발해문명이 던진 메시지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한민족만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역사는 결코 한반도, 그것도 한반도 남부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과 우리 역사는 결코 한민족만의 역사가 아니라 주변 종족과 융합을 통하여 창조해낸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뒤 거란족이었던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멸하고 요나라를 세우고 발해의 후손들은 금나라를 세웠다. 그러니 금나라는 후발해라 칭할 수 있다. 금나라를 세운 누루하치는 나라를 세우고 후금이라 했다. 이 나라가 몽골족이 통치하던 원나라를 멸하고 중국 전역을 장악한 청나라다. 이렇게 보면 사실상 중국 전역을 통일한 청나라는 우리민족의 선조들이 세운나라나 다름없다. 따라서 한족이 통치하던 일부를 뺀 현 중국은 우리 선조들의 땅이었으며, 우리선조들이 수만 년 동안 가꾸어왔던 찬란한 문화유산의 본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 몽골의 골동품, 몽골인들의 삶의 흔적들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몽골역사의 재발견

여기서 몽골과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면 1206년 칭기스칸의 영도아래 몽골제국을 수립, 쿠밀라이대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하여 현재의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및 중앙유럽, 아라비아 반도를 포함하는 광대한 강역을 통치하였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목조)는 전주를 떠나 두만강 유역인 요동지역에 자리 잡은 뒤인 1255년 5000호 천호장과 다루가치(원나라의 지방관리)의 지위를 원 황제로부터 하사받아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와 이행리의 증손자 이성계 때까지 5대에 걸쳐 세습됐다는 연구결과(몽골계 중국학자 에르데니 바타르 박사)에서 고려와 몽골의 깊은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이성계는 원 제국으로부터 고려의 동북면 지역을 감독하는, 다루가치라는 벼슬을 하사받았고, 이성계 세력의 본거지가 동북면 이었다. 이에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관계를 재해석 하는 작업이 필요할 듯하다.

14세기 중엽 내부적 분쟁의 결과로 몽골제국이 해체된 후, 청나라의 교묘한 몽골분열정책이 성공하여 몽골의 재통일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세월은 흘렀고, 1691년 돌로눌(Dolonor)조약에 의해 몽골은 정치적인 독립의 기회를 완전히 상실, 공식적으로 중국의 변방성(省)이 되었다. 그 후 2세기동안 몽골은 종족의 분산 과정을 겪으면서 남부 지역 내몽골은 외국 열강의 식민지화가 이루어지고, 북부 지역 외몽골에는 신정권력이 강화되었다.

1921년 몽골 독립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흐바타르(D.Sukhbaatar) 장군은 몽골 인민혁명당을 창당, 소비에트 적군(赤軍)과 연합하여 중국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선포하였다. 1924년 새롭게 제정된 헌법에 따라 몽골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으며 이 때 수도를 울란바타르로 개명하였다.


▲ 몽골의 거대한 야시장에는 없는 물건이 없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린다.


중국은 1946년 현 몽골의 주권 독립 국가를 인정하였으나, 내몽골은 중국의 자치구로 편입시켰다. 이후 1988년 구소련의 개혁·개방정책의 영향으로 몽골인민혁명당은 몽골판 페레스토로이카인 신칠렐(Shinechilel)정책을 채택하였으며, 1990년 7월 인민혁명당 일당 독재를 포기하고 최초의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였다.

몽골에서 러시아가 주둔한 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약70년 동안은 경제적인 도움은 받았으나 한편으로 몽골의 민족성을 철저히 파괴시키려 노력한 흔적이 많다. 성씨를 없앤 것과 글씨를 키릴문자화 시킨 것, 남자들을 교육에서 소외시킨 것, 이밖에도 러시아가 철수하면서 산업시설 및 농업생산기지를 파괴시켰는데 일부 몽골인들도 죄의식 없이 관여한 것에 씁쓸한 생각이 든다.


▲ 쪽빛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초원에 영롱한 아침이슬이 내렸다.


몽골의 자원 축복인가 저주인가?

6월 29일 날 울란바타르대학교 실습농장 바트 숨베르에 머물 때 몽골의 총선이 있었다. 일부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전날 투표를 위해 떠나고 일행들은 대초원을 답사하면서 말도타고 백리향 군락지도 찾았다. 그리고 7월 1일 울란바타르에 있는 국립자연사박물관과 역사박물관을 차례로 들러보고 7월 2일 날에는 갖가지 진기한 보물들이 가득한 골동품 야시장에도 들러보았다. 오후에는 울란바타르시 외곽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데 차안에서 몽골의 바타교수가 인민혁명당사 앞에서 부정선거 항의 시위가 났다고 했다. 시내에 있는 인민혁명당 건물앞 도로에 다다르니 시위에 대한 실감이 났다. 순식간에 출입통제가 된 찬선을 빠져나왔던 기억이 새롭다. 이 사건은 폭동으로 발전하면서 그 성격이 바뀌었다고 한다.

몽골폭동의 요지는 태생부터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인민혁명당과 민주당과의 세력충돌이었다. 인민혁명당이 구 공산당의 후신이라면, 1990년 몽골 민주화시기 민주화를 주동 했던 세력들이 이합집산하면서 만든 정당이 민주당이란다. 1996년 6월30일 선거에서 몽골민주연합은 뜻밖에도 집권 몽골공산당(MPRP)을 참패시키고 75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공산정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민주연합은 정책실패를 가져왔고 그 결과 인민혁명당이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탄생했던 것이 민주당이다. 이 때문에 두 집단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큰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하겠다. 문제는 한국은 개발족들이 아파트 건설로 국가 경제에 막강한(?) 힘을 발휘한 것만큼이나, 몽골에서는 광산족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래서 인민혁명당이나 민주당은 이번 총선으로 광산개발의 이권을 발휘하게 된다. 물론 두당모두 이윤은 국민들에게 돌려준다는 공약을 내세웠으나 알 수 없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사업단 전문위원 이주영님은 우리나라보다 몇 배나 척박한 환경에서 생태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진행되는 밀어붙이기 식의 개발은 그 몇 배로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감안할 때, 자연의 복수는 이미 시작된 셈이라고 지적했다. 일제차와 폐차 직전의 한국산 중고차가 공존하는 나라, 전국민의 40퍼센트가 빈곤선 이하에서 살고 있는 나라, 실업과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는 나라가 바로 몽골의 또 다른 모습이란다.


▲ 울란바타르대학교 농과대학 학생회장 목이와 우수학생 묵 쫄라, 몽골은 우리와 닮은 점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다른 것 또한 많다. 우선 여성중심의 모계사회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왜 경제적 가치 즉 돈 버는 일에만 온통 정신을 쏟는가. 자기중심을 잡지 못한 채 단순히 돈의 가치만을 찾아 그것이 최고의 선(善) 인양 삼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제대로 된 역사인식 없이 삶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지 않은 채, 돈만 벌면 그뿐이라는 사고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쉽게 헤쳐 나올 수 없는 절망감을 심어주고 있지 않은가.

잃어버렸던 얼굴들이 살고 있었네!

몽골은 우리와 닮은 점이 너무나 많다. 흔히 갓난아이의 엉덩이에 푸른 반점을 \'몽고반점\'이라 부른다. 요즘은 바이칼반점 또는 밝할 반점이라고도 한다. 낮은 코, 가는 눈, 튀어나온 광대뼈 등도 몽골리안 즉, 바이칼리안(밝할인)의 특성이고 \'오랜 세월 고립된 곳에 살다가 생긴 특수한 형질\'이란다. 즉 이는 오랜 세월 혹독한 추위 속에서 빙하기 바이칼호수 주위에 고립되어 살던 바이칼리안(밝할인)의 특성이다.

그러기에 몽골은 가깝고도 먼 나라다. 이러한 몽골이 자본주의식 개발의 열풍에 빠지는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길을 선택하여 가게하고 싶다. 무조건 적인 자본주의식 개발이 아닌 호주나 뉴질랜드와 같이 보존하면서 생태적인 가치를 살리는 문화와 관광산업으로 말이다.

우리는 몽골을 막연히 우리 민족의 시원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러시아 몽골학계도 칭기즈칸이 발해 말갈의 후예이고, 몽골은 발해 유민들이 세운 나라일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경향신문 5월31일자 보도) 이에 7월1일 울란바타르대학교에서 몽골의 역사학자인 남칠님을 만났다. 남칠님은 현 몽골 울란바타르대학교 교수이자 학술위원회 서기겸 연구처장이다. 역사를 전공하고 민속학과 전통가정학 등을 두루 연구한다.


▲ 7월1일 울란바타르대학교에서 몽골의 역사학자인 남칠님(중앙)을 만났다. 남칠님은 현 몽골 역사를 전공하고 민속학과 전통가정학을 연구한다고 한다.


다음은 몽골의 남칠님과의 대담이다. 우선 몽골을 연구하는 학자는 몽골국립대학의 3명과 한국의 이안나 연구자가 있음을 이야기 했다. “현 몽골은 한국의 80년대와 비슷한 어려운 문제를 지금 겪고 있으나 한국에서 정치와 경제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했다.

“몽골역사는 초기시대부터 삼국시대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연구해야 한다. 좋은 연구자들이 언어, 민속, 역사를 따로따로 하는 것이 아닌 함께 준비해야 한다. 연세대학교는 울란바타르대학교의 교육 사업을 도울 수 있다.”

“한국학 학생들을 뽑아 교육시키고, 학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교류하는 것이 좋겠다. 학자들이 합쳐 연구하고 주제와 연구결과를 여름과 겨울에 발표(세미나)하여 교류를 강화했으면 한다. 우리의 속담중 ‘가려는 곳을 만져 본다.’ 지금 이야기가 가장 원했던 것이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한국과 몽골, 중국의 관계가 가깝게 되었고, 그래서 따로따로가 아닌 하나로 연구되어야 한다. 유물과 유적 그리고 풍습의 관계로 볼 때 만주족과 몽골족 그리고 고려족이 가깝다.”라며 통역을 통해 들려주었다.

역사문화연구가 이병화님은 “한국과 몽골은 근대에 와서 국력이 쇠약해져 자신들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한다. 그러니 오늘날 21세기 한-몽이 서로 윈-윈의 돕는 관계로 가야한다.”하니 남칠 교수는 1991년 한국과 몽골이 수교이후 긍정적인 것으로 울란바타르대학교의 설립을 내세웠다.

이어 역사문화연구가 이병화님은 “몽골에 살고 있던 이성계의 6대조가 고려에 왔는데 고려와 원이 전쟁을 종료하면서 강화의 조건으로 원나라 군대가 고려에서 완전 철수하되 72명의 다루가치가 고려의 통치에 관여하도록 합의되었는데 그 72명중 한 사람이 이성계의 6대조로서 한양(남경)의 행정관으로 왔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에 대한 남칠 교수의 견해를 물었다.

남칠님은 “몽골의 풍속, 족보를 통한 가정연구에서 얻었던 결론은 한국은 큰아들에게 재산 물려주는 것과 몽골은 막내아들이 재산을 물려받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후로 14년 동안 한국, 아시아, 중국, 러시아 가정을 혼자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몽골의 10개 정도의 국가에서 몽골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러시아, 작은 민족도 많이 있다.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등 몽골의 역사와는 좀 멀리 있다. 그러나 한국은 문화적 관계가 있다. 특징적인 것을 1-2가지 든다면 몽골은 80만년 전 기원했으며, 30만년 전 관계는 옛날 사용 돌 무기와 주거가 비슷하며, 머리 형태도 실제적으로 똑같다.”

“내몽골의 문제는 1949년 이전 한족의 중국역사에 포함됐다가 세계2차 대전 결전 후 독립되었으며, 이후 한족이 내몽골을 차지했지만 계속해서 문화적 관련성을 세미나 등을 통해 연구하고 있다. 요즘은 관계가 넓어졌다. 그러나 현 내몽골은 중국에 포함된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몽골과 러시아, 중국 가운데 있다.”라며 질문의 요지를 빗겨간 이야기를 했다. 곧이어 자신의 역사학연구소를 자세하게 안내하여 주었다.


▲ 몽골에서 길을 묻다.


이후 7월3일에는 연세대학교 CT연구단(단장 설용건)이 기후변화로 인하여 점점 더 심해지는 황사와 수자원의 고갈 등 환경위기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몽골의 농촌지역을 돕고자 울란바타르대학교(총장 윤순재) 와 상호협력을 위한 기본합의(MOU)를 체결했다.

그동안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NGO활동을 펼쳐오고 있는 CT연구단은 향후 기독교환경운동연대의 소속 교회들과 사회적인 기업, 단체등과 나무심기를 통한 생태 숲 가꾸기 운동을 적극 펼쳐 나갈 것이다.

연세CT연구단과 울란바타르대학교간 상호협력을 위한 기본합의의 주요내용은 아래와 같다.

각 기관은 몽골의 역사와 문화, 환경을 보전하며, 지속 가능한 농업과 연계된 적정기술·문화관광·축제·디자인분야 등의 조화로운 창달을 위해 노력한다.

또한 각 기관은 상시적 협력체를 구축, 농학과 관련된 다양한 학제간(學際間, Inter-disciplinary Research))소통을 위한 교육연구를 자문하고 다음 사항에 대하여 상호 협력하기로 하다.

첫 번째, 울란바타르대학교 농과대학 실습농장(2천 만평)의 장단기계획 입안분야는 실습농장의 역량과 조건에 맞는 차별화된 장단기발전계획을 디자인하고 친환경농업기술의 특성화된 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발전 시킬 수 있는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한다. 연세CT연구단에서는 울란바타르대학교 농과대학의 우수한 학생에게 제공할 별도의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한다.

두 번째, 자연에너지 및 향기식물실증연구단지 조성분야에서는 몽골의 자연에너지(태양, 지열, 풍력, 수력, 연료전지, 바이오에너지 등)분야를 다양하게 실증 연구하여 에너지 자립기반을 만든다. 몽골의 생태체험관광을 위한 자연숲 조성, 생태학습단지를 조성하고 생태건축, 자연에너지, 환경보전기술, 자원의 재활용 방안 등을 차별화하여 교육연구 할 수 있는 가칭의 \'생태테마공원\' 설립을 추진한다. 몽골의 특성에 맞는 축산(바이오)과 사막녹화(임업)에 대한 공동연구를 추진한다. 연세CT연구단은 각 분야 전문 인력과 각종 기획자문, 기술지원을 하며, 울란바타르대학교 농과대학 실습농장에 향기식물연구 및 상품개발 분야 시험재배와 공정개발을 위한 실험장을 확보한다.

이를 위해 울란바타르대학교 농과대학은 적절한 부지를 선정하여 구체적인 재배 및 보급단지를 조성하고 이의 재원확보를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이밖에도 한-몽 문화네트워크 구축과 디자인개발 분야로 몽골의 지도자 등 문화발전중심추진인력의 양성과 낙후된 몽골농촌지역의 활성화를 위해 한-몽 문화관광, 축제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과 몽골의 자연환경과 역사문화를 기본으로 하는 디자인 콘텐츠를 개발하고 지역에 맞는 적절한 이벤트와 축제를 지원하며, 정기적인 심포지움 개최지원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 것을 논의했다.


▲ 몽골의 야생화 하나



▲ 몽골에서는 에델바이스를 흔하게 볼 수 있다.



▲ 몽골의 야생화 둘



▲ 몽골의 야생화 셋


댓글목록

최장수님의 댓글

최장수 작성일

멋진 여행을 하셨군요~
몽골은 광활한 초원이 상상만으로도 가보고 싶은 열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곳에서 울란바타르 대학이 큰 꿈을 품고 일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2000만평이란 넓은 땅을 환경친화적으로 일구워서 풍요롭고 평화로운 땅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