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교회-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교회
사랑방교회 소개 사랑방성서모임 성서일기 사랑방앨범 나눔의방 자료실
사랑방교회-자유게시판

2006년을 맞는 사랑방교회 홈페이지가 유기적인 커뮤니티가 되기를 바랍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류기석 작성일05-12-26 11:42 조회2,167회 댓글1건

본문

2006년을 맞는 사랑방교회 홈페이지가 하나님, 자연, 인간 모두의 복된 삶을 위한 유기적인 커뮤니티가 되기를 바랍니다. <보다 활기찬 게시판을 위하여 요즘 인터넷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글을 올립니다.>

생태계의 유기적인 순환을 위하여
농부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6) 생태순환적인 농업문화가 대안이요 희망이다

내가 태어나 자라온 곳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천연림이 둘러쳐진 광릉 숲 소리봉 자락이다. 현재는 도농복합도시가 되어 성한 곳 없이 이곳저곳이 아파트와 도로, 각종 쇼핑상가와 조립식 공장들로 북새통을 이루지만, 20년 전만해도 농촌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농업의 고장 이었다.

여름철 동네 앞을 흐르는 왕숙천 뚝방에 모여든 아이들은 하루 종일 멱을 감거나 물고기와 다슬기를 잡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가 많았다. 때론 불거지라는 커다란 어미 피라미들을 돌로 가두어 잡거나, 어항으로 잡아보는 기쁨은 말로 할 수가 없다. 많은 비가 온 뒤면 신작로 옆 논에는 커다란 붕어들이 펄쩍펄쩍 뛰노는 모습과 도랑마다 미꾸라지며, 메기들이 들통으로 하나 가득 잡히기도 했는데 지금은 화학세재나 농약 등의 오염으로 찾아볼 수 없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렇듯 첩첩이 둘러쳐진 산과 들판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 아이들은 물과 돌 그리고 물고기와 친구다. @ 류기석 2004 전북무주

겨울 이맘때쯤이면 동네 뒷산에 올라 가재와 개구리를 잡기도하고, 얼음 치기와 칼싸움, 말뚝 박기, 잣 치기, 구슬치기, 비석치기, 딱지치기 등의 놀이에 온통 정신이 없었다. 지금처럼 각종 오락물이나 TV를 넘어선 컴퓨터, 인터넷 등의 무차별적인 공세에 시달리는 어린 세대들과는 다른 생태순환적인 놀이를 접하며 지냈던 것 같다. 하루해가 지면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저녁연기와 함께 어머니들이 제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에 겨울밤은 더욱 정겨움으로 넘쳤다.

침묵의 봄이 지나면 어디를 가도 죽어있던 여리고 여린 생명들의 역동적인 부활에 순수한 아이들과 농부들의 마음은 벌써부터 들판과 밭으로 향했다. 봄날의 따스한 햇살에 나뭇가지들은 연신 연두색 잎들을 돗아내던 무렵 거미와 새를 좋아하는 동네 형님이 뒷산에 있는 나무둥지에서 막 깨어난 어린 까오기 두 마리를 분양해 주셨다. 그날부터 새에 대한 최초의 체험학습이 시작되었다.

▲ 자연은 아이들의 놀이터다 @ 류기석 2004 전남순천

이동식 닭장을 동네어귀에서 주어와 가두고는 어린 까오기를 정성껏 보살폈다. 어린 까오기는 육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매일 주변에 있는 파리와 모기, 논마다 지천인 개구리 등을 낚시질하여 적당한 크기로 요리하여 새들에게 먹여 주었다. 두세 달 후 까오기는 무럭무럭 자라 본연의 긴 부리와 긴 목을 가진 제 모양 제 모습의 까오기 새로 갖추어졌다. 학교가 파하면 즉시 까오기를 데리고 먹이 사냥과 함께 양 어깨에 얹어 산보를 즐기거나, 학교와 동네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보여주었던 기억이 난다.

이놈들이 사춘기를 거쳤는지 제법 성숙해지면서 커다란 닭장공간을 싫어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이따금씩 한 마리가 먼저 날아가 잡히지 않자 또 한마리가 날아가 버리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내 중심적인 생각에서 오래도록 잡아놓을 욕심으로 자유를 주기 보다는 가두려 했던 것이 까오기와의 술래잡기 씨름을 했던 것 같다.

▲ 자연학교에서 물고기를 잡아보는 아이들 표정 @ 류기석 2004 경북영덕

야성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과 때가되면 따듯한 남쪽으로 가야 된다는 귀소본능의 습성을 느꼈던 나는 까오기 들에게 자유를 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풀어주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봐왔던 이웃집 아주머니와 친구들은 하나같이 정성들여 키운 대가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다.

그런 일이 있고 한두 달 후쯤, 까오기를 까맣게 잊고 학교에서 돌아온 오후 집 앞으로 까오기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평소 까오기를 부르던 소리를 내며 달려가 잡을 욕심을 내고 잡으려 하였으나 한사코 잡히지 않고 2미터정도의 거리만 유지했다. 먹이를 잡아주고 별짓을 다해 유인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문뜩 하늘을 올려다보니 또 한 마리의 까오기가 파란하늘 상공에서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그 순간 머나먼 남쪽으로 가기 전 나에게 작별인사를 왔다는 눈치를 채고는 잡겠다는 생각을 중단했다.

그저 먼발치에서 키워준 나를 바라다보는 까오기의 마음과 당당하게 자라준 까오기를 바라다보는 내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우리는 그렇게 작별을 고했다. 하늘높이 힘차게 날아오른 까오기가 숫놈인지 암놈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결혼하여 함께 남쪽으로 향하고 있음은 틀림이 없어 보였다. 한동안 남쪽으로 날아가는 내 자식 까오기를 바라보면서 부디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 갯벌은 자연이 주는 선물이자 생태계의 보고다. @ 류기석 2004 전남순천

이쯤에서 까오기와의 해피엔딩이 끝나면 필자의 감동이 적었을 것인데, 다음해에 필자가 학교에 가고 없는 틈을 타서 까오기 한 마리가 집 앞에 오래 머무르다가 돌아갔다고 이웃에 사시는 아주머니가 상기된 표정으로 이야기 해주셨다. 그 순간 한낮 새에 불과한 까오기가 길러준 정에 대한 마음으로 그것도 일년 후에 주인의 집에 인사차 들렀다 생각하니 이것이 새와 인간의 유기적인 돌봄의 순환관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도 그때를 회상해보면 가슴이 뭉클해 온다.

유년시절 귀가 따갑도록 선생님에게 들었던 우리들의 자연환경 평가는 산지가 70~80%로 무가치함과 대량농업생산에 취약한 농지환경, 각종 자원이 부족한 국가로 희망 없는 나라쯤으로 폄하했던 이유로 손쉽게 자연생태계의 유기적 순환 고리를 끊고, 비생태적인 콘크리트 개발과 검은 연기로 온 하늘을 덮는 산업혁명적인 발전에 생명을 내어 맡기는 꼴이 되었다.

산업시설이 하나 없는 동네 중심부에는 커다란 팥 공장이 하나가 있었다. 학교와 시내를 오가는 공장길가 담벼락 밑에는 심상치 않은 악취가 나더니, 도랑이 서서히 오염으로 물들어 갔다.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을 지내면서 그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는 더욱 기승을 부려 왕숙천으로 향하는 아이들뿐만이 아닌, 어른들의 발길까지도 멈추게 했다. 뭇 생명들의 작은 신음에도 민감한 마음이 들었던 내게 공장폐수의 기억은 아직도 지울 수가 없다.

1970-1980년대를 넘기면서 도시화의 빠른 진행은 밭과 과수원에서 자급자족하던 자연발효퇴비인 똥의 가치를 몰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집집마다 양변기와 싱크대가 쏟아 붓는 물의 양이 늘어나면서 맑았던 하천은 급격하게 검붉은 빛깔이 되어 오염된 거품을 만들어 여태까지 죽어가는 왕숙천을 유지시켜 왔다. 최근 국가적으로 엄청난 환경비용을 쏟아 부어 하수종말처리장을 건설하고, 각 가정의 하수는 일괄적인 화학적 생물학적 폐수처리를 거쳐 곧장 한강을 통해 흘려보낸다.

이제 모든 농촌의 아파트와 단독주택 그리고 농가에서는 분뇨가 함부로 땅으로 가지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제 2천만 수도권 시민들의 훌륭한 천연자원은 정화조에서 퍼 올려진 다음 분뇨처리장 탱크에 잠시 머물다가 인천 앞바다를 거쳐 군산 앞바다 250킬로미터 공해상의 지정 투기장에서 바닷물과 함께 희석되어 사라진다. 국제법상으로도 문제가 많은 이상한 항해는 서해안의 적조를 유발시킨단다. 이뿐만이 아니라 대형식품회사의 제조과정에서 수반하여 나오는 폐기물과 하수종말처리장에서 수집한 최종 슬러지도 이러한 방식으로 처리가 된다니 다시 한번 미래세대에게 물려줄 바다생태계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

건강한 흙 한 숟가락에 살아있는 생물들의 숫자는 지금까지 왔다간 인류전체 인구를 합한 숫자보다도 많단다. 흔하고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라고 얕보고 함부로 학대하거나 파괴한다면 인류의 불행은 머지않아 자연의 대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다. 과거 어디를 가도 깨끗한 땅과 하늘, 물과 바람, 동물과 식물들이 이루는 본래의 기능으로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이 넘쳐 무한할 것이라고 여겨왔던 것이 자연생태계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빠르게 개발되고 발전된 오늘날 전 국토는 화학적 고분자합성 비닐과 플라스틱 빈병,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의 시체들로 가득하다. 죽지 않고 썩지 않는 쓰레기들의 세계임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다시 한번 단절된 생태계가 아닌, 유기적인 순환을 위한 근본적인 가치의 재인식과 각성으로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이 돌아오기를 2006년을 맞는 오늘 간절히 기도한다.

▲ 숲은 생명이다. @ 류기석 2004 경기광릉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