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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3-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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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장희 작성일05-05-26 16:50 조회1,56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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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 글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 교회공동체를 생각하게 되었고 무림리 공동체의 새로운 형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의 시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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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과 다짐
지리산 두레마을 이야기
김호열

편집자의 말

두레마을의 역사는 우리나라 공동체 운동의 역사와 일치한다. 그만큼 오래 되었고 시대적 변천과 함께 변화해 왔다. 두레마을 공동체는 지금부터 30여 년 전 서울 청계천 일대에서 빈민운동을 하던 김진홍 목사의 활빈교회가 그 모태이다. 청계천 일대가 도시계획에 의해 재개발되자 김진홍 목사는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사람들을 이끌고 경기도 남양만으로 집단이주하여 유기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두레마을 공동체를 만든다. 이후 두레마을은 김진홍 목사의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회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남양만에 자체의 중·고등학교까지 둔 90여 명의 생산 공동체로 발전하였으며 미국과 괌, 중국 연변에도 그와 유사한 형태의 두레마을을 건설하였다. 도한 두레마을은 전국의 주요도시에 ‘두레유통’이라는 유통체인을 두어 생산물들을 유통시키고 있다. 이밖에도 두레공동체는 선교회, 연구원, 출판사 등 십여 개의 외곽조직을 거느리고 있다.
2002년에 두레공동체는 경남 함양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것은 전에 건설되었던 것과 같은 또 하나의 두레마을이 아니다. 그들은 남양만에 건설되었던 두레마을이 일정하게는 실패했다고 인정하고 함양에 생태공동체 형태의 새로운 마을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남양만의 두레마을은 학교만 남겨두고 발전적으로 해체되는 과정을 밟고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함양 두레마을의 새로운 책임자로 부임한 김호열 목사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공동체적 인간관계론이다. 많은 이들이 짐작으로 알고 있듯이 공동체의 어려움은 곧 인간관계의 어려움이다. 아무리 이상이 좋고 의지가 강하더라도 함께 사는 이들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공동체는 지속되기 어렵다. 김 목사는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자신을 적응시킴으로써 내적 성화와 함께 공동체의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에게 나를 맞추는 것이 싫어서 공동체를 회피하지만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는 가치지향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을 진지하게 맞닥뜨리는 것이야말로 나를 비우는 참된 수행이라고 본다.
김호열 목사는 공동체에 몸담은 지 15년이 넘는 두레마을 핵심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오랫동안 미주지역 두레공동체의 책임자로 있다가 작년 3월 1일부로 함양 두레마을의 책임자로 왔다. 함양 두레마을이 세계에 퍼져있는 두레공동체의 총본부인 것을 생각하면 공동체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제 함양 두레마을은 30여 년에 걸친 두레공동체의 노하우를 총결집하여 종교적 생태공동체의 이상향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과연 새로운 공동체가 남양만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한국적 종교공동체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을까? 그 관건은 역시 인간관계에 달려있다.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좋은 글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이야말로 모든 편집자들의 보람일 것이다. 공동체 내의 인간관계 문제에 대해 혼란한 감정에 싸여 있던 터에 이 글은 그러한 보람을 한껏 느끼게 해주었다. 지난 12월, 겨울 삭풍이 몰아치는 지리산 농장에서 자체 생산한 산머루주을 마시며 나눈 진지한 대화를 계기로 이렇게 지혜로운 글을 만나게 됨을 보면, 아무리 바쁘고 길이 험해도 공동체 탐방의 여정을 멈춰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객원편집자 황대권(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


직업을 갖고도 아이 넷을 남편의 별다른 도움 없이 잘 키운 아내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분들께 내가 자주 쓰는 표현이 있다. “한 석 달만 살아보시고 나서 다시 말해 주시지요.”
이십삼 년을 살아온 아내가 싫다거나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좋은 아내 덕분에 그렇게 쉽게 살아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내심을 내뱉고 싶어서다. 좋은 부부사이라도 인간관계는 결코 쉽지 않다.
지리산 두레마을을 방문하신 분들이 자주 하는 말이 “이처럼 좋은 곳에서 뜻이 맞는 사람끼리 모여 사니 얼마나 좋겠어요.”다. 이런 말을 들을 대마다 차마 입 밖으로는 내놓지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한 달만 살아보시구려.”
나의 공동체 경험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인간관계다. 그것도 같이 사는 공동체 가족들과의 관계다.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보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관계임을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하며 살고 있다. 두레마을 공동체는 가족이다. 그래서 어떤 업적이나 이념보다는 함께 사는 가족들의 행복을 우선시한다. 그러다보니 가족 한 사람이 다른 가족 한 사람의 마음에 차지하는 공간이 크다. 그래서 지리산 두레마을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고 지키려 애쓰는 것이 공동체 가족의 하나됨이다.
지금 마을에는 돌이 지난 어린아이부터 67세 된 노인까지 30명이 살고 있는데, 그 구성원이 너무나 다양하다. 전과자, 신용불량자, 은퇴한 교수, 미국에서 20년 이상 살다온 사람, 전직 기업체 사장, 정신장애인 그리고 목사 등. 더구나 성질이 급한 사람, 꼼꼼한 사람, 보수적인 윤리관을 지닌 사람, 개방적인 사람,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섞여있다. 그러니 아무리 생태공동체로서 숭고한 뜻과 아름다운 비전이 있다 하더라도, 사소한 일에서조차도 부딪침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공동체를 보고 방문자들은 마을 운영을 위한 어떤 규약이나 규칙이 있는지 물어보곤 한다. 그동안의 공동체 경험으로, 규칙 혹은 규정 등이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사람의 인격이나 성격, 가치관 따위를 바꿀 수 없다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갖고 있다. 그래서 두레마을에는 어떠한 규정이 없다. 그렇지만 가족이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따뜻하고 열린 가족관계를 위한 다섯 가지의 ‘고백’과 다섯 가지의 ‘다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고백하고 다짐한다. 먼저 다섯 가지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

1. 가족이 내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다.
다양한 삶의 배경을 갖고 만난 사람들이 처음부터 부딪치는 어려움은, 어쩔 수 없이 상대를 자기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갈등은 시작된다. 내가 할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상대에게도 그대로 적용하게 된다. 육담을 잘하는 사람의 말의 유쾌함이 종교적 경건함으로 무장된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성폭력으로 바뀐다. 나같이 대도시에서만 살아온 사람이 밭에 들어가서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농사를 지어온 형제에게는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수백 명이 되는 손님들에게 식사 대접을 할 때, 정신없이 돌아가는 주방에 어정쩡하게 서 있어서 비좁은 주방의 교통체증만 증가시켜 열받은 신경에 불을 붙이는 가족이 늘 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느냐? 끝까지 결로닝 나지 않는 것이 공동체다. 그래서 공동체 가족이 할 수 있는 역량보다 더 많은 것을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의 삶을 부정하는 잔인한 폭력임을 인정하며 고백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고백이 가족의 성장을 막거나 무책임하게 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살다보면 이 고백이 오히려 상대와 더 빠른 시일에 하나 되게 만드는 경우를 종종 체험한다.

2. 훌륭한 행동과 놀라운 능력은 유혹이다.
두레마을은 축소된 사회이자 소우주다. 일반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여기서도 모두 일어나거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좁은 사회로서 공동체가 갖는 폐쇄성 때문에 특정 사안이 갖는 의미와 결과가 일반사회보다 훨씬 증폭된다. 예를 들면, 공동체 내에서 인정받거나 비판받는 내용이 일반사회에서는 미미한 것일지라도 공동체 내에서는 그 의미가 크다. 왜냐하면 소수의 공동체이지만 공동체가 가족 구성원 각자에게서 차지하는 공간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에서는 패배했을지언정 공동체 내에서 격려하고 인정하는 것이 한 개인의 인격과 자존감 등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크다. 동시에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훌륭한 행동과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강박감에 시달리게 된다. 오늘날 사회와 교육이 훌륭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기리는 풍토가 많은 문제를 야기하듯이, 공동체 내에서도 이런 시대정신이 유혹으로 다가와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한 가족 안에서 누가 누구보다 훌륭하고 능력 있다고 말할 수 없듯이, 공동체 가족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렵다. 더욱이 두레마을 같은 인위적이며 가치지향적인 공동체에서는 이 유혹이 크다. 이 유혹에 빠져서 훌륭하고 능력 있는 자로 인정받으려 애쓰다가, 본인도 어느 날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공동체 가족에게 큰 상처만 남기게 된다. 이에 공동체 가족은 훌륭한 행동과 놀라운 능력은 유혹임을 고백하며 스스로를 추스르고 있다.

3. 사상이나 교리가 아닌 ‘바른 관계’가 공동체의 진리이다.
두레공동체 운동이 포괄적으로 지향하는 몇 가지 이념들이 있다. 요즈음 생태운동들이 표방하는 여러 가치 체계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 게다가 두레마을은 기독교공동체로서 기독교 교리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타당성과 설득력을 지닌 무수한 가치들이 이 작은 공동체를 떠돌고 있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귀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안에서 공해가 되어 공동체 가족들의 호흡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사상과 교리의 차가움이 공동체를 지배하게 되면 공동체 가족들의 인격은 무시되고 말살된다. 그래서 공동체 내에 현존하는 인간관계가 그 무엇보다 우선적인 진리임을 가족들은 고백한다. 예를 들면, 심한 좌절에 빠진 가족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기독교 핵심 신앙을 아무리 외쳐보아야 무의미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에게 실질적으로 전하는 것이 진리이다. 무기력에 빠져 기도도 할 수 없는 가족에게 기도만이 살 길이라는 말을 해대는 것은 신앙적 고문에 불과하다. 다른 가족이 그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허위의식이 사회나 대중을 휘어잡고 조작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공동체 가족 내에서는 영향력 행사가 불가능한 일이다.
간혹 이런 가치 체계에 세뇌되어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겠노라고 심각한 모습으로 공동체를 방문하거나 합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는 이런 분들이 절대로 설득이 되지 않고, 결국 어느 날, 공동체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서수선한 논문들만 남기고 사라진다. 두레마을은 병들었든, 찌그러졌든, 심지어는 부도덕한 일이 일어났더라도 살아가는 가족들의 생명체이기에 가치보다는 삶이 실재적이다.

4. 가족의 약점과 한계 속에서 미래의 풍성한 수확을 본다.
늘 함께 사는 사람의 약점과 한계를 감당한다는 일은 어렵다. 반복되는 실수로 없는 살림살이에 재정적 손실을 주는 경우나, 모임에 습관적으로 늦거나, 거친 품행으로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등 견디기 힘든 일들을 누구나 겪게 된다. 어떨 때는 공동체의 장래에 대해 절망할 정도로 심각한 치부들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공동체에서 발행하는 가족들의 한계가 아니라, 그 한계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것은, 문제를 일으키는 가족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킨 가족 대문에 힘들다고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후자가 훨씬 더 공동체에서 파괴적이다.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인격의 한계나 오래된 나븐 습관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들고 괴로운데 한두 명이 자꾸 떠들어댈 때는 공동체 전체 가족이 궁지에 몰리게 된다. 왜냐하면 이런 한계가 없는 가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레마을은 농업공동체이다. 그래서 봄, 여름 힘들게 일하면서도 가을의 열매를 바라는 소망으로 그 힘든 나날들을 이겨낸다. 가을의 수확이 부족하면 다음해에 얻을 풍성한 수확을 소망하면서 얼굴에 웃음을 띤다. 즉 지금의 부족과 한계를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이런 영농철학을 사람에게도 적용하려고 한다. 가족이 보여주는 지금의 부족함이 언젠가는 열매를 풍성히 맺을 것을 기대하면, 그 인생의 열매가 어찌 농작물의 수확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가족의 한계로 인해 괴로울 때마다 그 약점이 바로 소망이라는 고백을 하며 오히려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

5. 과장되고 허세스런 표현과 자기노출은 어리석은 일이다.
두레마을이 공동체 가족이긴 하지만,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가족은 아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서 모를 수밖에 없다. 자연히 자기표현에 진실성이 결여되기 쉽다.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진 않더라도, 남자들 군대 얘기 하듯이 자기 과거사를 말하게 된다. 특히 지도자들의 경우 자신의 진실보다는 요구되는 여론에 떠밀리다 보면 과대포장하기 마련이다. 어린 자녀의 거듭되는 보챔에 부모나 조부모들이 자신과 주변의 얘기를 허세스레 표현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다보면 폐쇄된 공동체에서 ‘신화’가 만들어지게 되고 ‘영웅’이 탄생하게 된다. 우습고 어이없는 일이지만, 공동체에서 종종 일어나는 현상이다.
특히 기독교 공동체로서 두레마을은 신앙표현이 빈번하다. ‘믿는다’, ‘감사하다’, ‘사랑한다’, ‘이해한다’, ‘용서한다’ 따위의 신앙표현이 진실성 없이 습관적이며 피상적으로 난무하게 되어 이 말을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만들어버린다. 소위 ‘간증’이란 것도 너무 자주 과장된다. 그것도 은혜라는 미명하에 당당하게 자행된다. 일반적으로 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풍조이지만, 가정공동체가 이런 풍조에 노출되어 버릴 때, 가족끼리 지속적인 연기를 하며 살게 되는 비극을 맞게 된다. 과장된 말이 목까지 올라오는 순간에, 그 말을 내뱉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고백하려고 가족들은 애쓰고 있다.

이런 고백들이 가능한 빨리 없어질수록 그만큼 공동체가 성장하고 행복해질 것이다. 날이 거듭할수록 가족들에게서 좀더 수준 높은 고백들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이제 다섯 가지의 고백에 이어 다섯 가지의 다짐을 말하고자 한다. 고백은 자기 성찰인 반면, 다짐은 적극적 의지이다.

1. 가족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기다릴 것을 다짐한다.
초대 기독교 수도공동체 규칙서에서, “형제를 변화시키려 하지 말라”는 규칙을 읽은 적이 있다. 아마 수도공동체이니 형제의 잘못을 고치려 하는 것이 사랑이자 의무처럼 여겼을 것이다. 변화를 잘 시키는 사람이 훌륭하고 능력 있는 수도자로서 존경받는 분위기도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사들이 형제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수도공동체에 오히려 큰 걸림이 되어 급기야는 “형제를 변화시키려 하지 말라”는 규칙까지 생긴 것이다.
두레마을도 마찬가지다. 목사인 나 자신도 함께 사는 가족들을 내 의도대로 변화시키려는 강박감에서 자유롭지가 못하다. 함께 사는 가족들도 나에게 그런 기대와 요구를 해오곤 한다. 그래서 가족을 변화시키는 것이 나의 본분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변화시키려고 할 때는 어떤 기준이 있게 되고, 그 기준은 자연히 자기 자신이 되기 쉽다. 따라서 변화시킨다는 행위는 다분히 주관적이며 상대적이다.
그렇다고 가족이 변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 진리의 핵심의 하나는 귾임없는 자기 개혁이므로, 변화는 중요한 태도다. 즉 가족이 변화되어야 함은 분명하지만 누군가 의도해서 변화시키려 들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화되지는 않는다. 내가 아내를 만난 것은 30년 전이다. 학생시절 처음 만나 사귈 때, 내가 아내에게서 제일 싫어했던 부분이 지금도 여전히 제일 싫어하는 요소로 남아있다. 아내가 나를 볼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이란 이토록 쉽게 변하질 않는다. 변화는 되어야 하지만 변화시키려고 하지는 말라는 말이 모순처럼 들린다. 공동체 생활에서 터득한 변화의 진리가 있다. “가족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라, 기다려라, 기다리는 중에 내가 변화된다. 그러면 변화된 나로 인하여 가족이 변화될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적 변화론이다. 그래서 가족에게서 변화될 요소를 발견할 때마다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기다릴 것을 다짐하게 된다. 몇 번 경험하면서 오히려 자기가 먼저 변화되는 행복을 누리게 될 때, 공동체의 신비로운 맛을 새롭게 맛보게 된다.

2. 눈에 보이는 결과보다 보이지 않는 과정을 보기로 다짐한다.
해야 할 일들과 요구되는 일들이 끊이지 않는 것이 두레마을 공동체다. 비 오면 진창이 되어 방문자의 차량이 빠져서 곤혹스러울 때마다 길을 먼저 고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산머루 밭을 지날 때는 바로 연장을 갖고 와서 비뚤어진 지줏대를 곧게 잡아야지 한고 되뇐다. 명색이 생태마을인데 하수종말처리시설을 우선 작업으로 선정해야지 하며 작업순서를 정해 놓기도 몇 번째다. 자꾸 늘어나며 커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래도 미래가 중요한데 땅이 녹자마자 놀이터를 만들겠노라고 제법 미래지향적으로 마음을 먹은 것도 여러 번이다. 계곡의 가시 같은 비닐조각을 이번 주말에는 치워야지 하면서 해를 넘기고 만다.
이런 식으로 공동체 가족들은 노심초사 마음을 졸이며 지내지만, 정작 되는 일들은 별로 없다. 예외 없이 모두가 그렇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린이들은 방치되어 버리고, 계곡에는 늘 쓰레기가 있고, 생태적으로는 엉망이 되며 그렇다고 농사도 반듯하게 짓지 못하는 무능한 집단이 되어 버리고 만다.
실제로 이런 비판을 받을 때, 결과를 놓고 말하는 데에야 할 말이 없다. 속으로 “지가 살아보지···”하고 중얼거릴 뿐이다. 지난 공동체 세월 가운데 결과에 매달려 일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사람도 망친 많은 경험이 있다. 공동체는 살아가는 가족들의 삶 그 자체이지, 욕먹고 비판받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상적인 모델 제시가 아니다. 가족 서로에 대해서 그 삶의 단상들을, 때로는 의미 없는 일상성들 자체를 귀하게 여기기로 스스로 다짐하는 길이 공동체 전체를 유지시키는 힘이 된다. 참아야만 하는 존재의 무거움이 결과의 가벼움보다 우선되는 것이 공동체다.

3. 가르치지 않으며 단지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공동체 가족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우선이며, 교육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부산물일 따름이다. 부산물을 목적으로 착각하면 정체성에 근본적인 오류가 생긴다. 공동체에서는 아무에게서나 배울 것이 많다. 배우는 재미가 많은 것이 공동체 생활의 큰 부분이다. 나 같은 도시 출신자는 풀, 나무 이름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서 계절에 따른 일기의 변화와 농사일, 목공일, 잡다한 토목일가지 새로운 일 배우는 즐거움에 마을을 떠나있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다.
이렇게 배우는 일이 많은데 가르치지 말라는 말은 모순이 아니냐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공동체 생활에서 얻은 교훈은 역설이 많다. 열심히 배우려고 할지언정 의도적으로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생활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가르친다는 것이 어렵다. 가르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야 가르침이 되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이 어렵다. 목사인 나는 공동체 가족에게 설교할 기회가 많다. 웬만한 회중 앞에서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나인데도 불구하고, 몇 안 되는 공동체 가족에게 설교할 때는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삶의 모습에서 공동체 가족이 스스로 무언가 배울 기회가 더 주어지기도 한다. 공동체로 살기 때문에 목사인 나에게 설교보다 삶이 우선적일 수밖에 없다. 공동체에서 가르침은 없고 삶이 있을 때, 참 배움이 있게 된다. 가르치고 싶을 때마다 그 가르침대로 자신이 먼저 살아갈 때, 공동체는 교육 지옥이 아닌 배움의 천국이다.

4. 당위성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무슨 일을 합의하거나 충고를 들을 때 제일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은 바르고 원칙적이면서도 공허하게 들리는 말이다. 토의할 때 이런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하려는 일이 옳은 일이면 반드시 도움의 손길이 있을 터이니 재정과 사람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 열심히 계획을 세우고 논의할 때 이런 말이 튀어나오면 그저 멍해진다. “옳은 일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더구나 유기적 공동체에서 어떤 명제를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준협박이다. 당위성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세상을 포기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항상 이루어진다고 확신하거나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가 그동안 나름대로 공동체에서 얻은 운동 철학이다.
두레마을 식구들은 각기 맡은 일들이 있다. 주방을 책임지는 식구, 각 건물을 관리하는 가족, 차량과 기타 장비를 담당하는 식구가 있고, 기타 회계, 교육, 생활, 목공, 영농 등 각 분야별로 책임자가 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면 “담당자가 책임감 없이 이럴 수 있느냐”는 식의 비판이 쏟아진다. 그 외에도 목사가, 학생이, 공동체가, 생태운동이, 주부가, 어른이, 유기농사가, 남자가, 여자가, 심지어는 개가 이럴 수 있느냐는 식의 표현을 자주 듣게 된다. 좋은 생각과 이상 그리고 이념 등은 끊임없이 타인을 자기화시키려 한다. 이렇게 될 때 인격은 상실되고 만다. 중요한 공동체 영성의 하나는 ‘끊임없는 자기의 타인화’이지 ‘타인의 자기화’가 아니다. 당위성을 근거로 내리는 판단은 자신과 공동체가 아닌 허구에 의해 내린 결론이 되어 버린다.

5. 가난하고 슬픈 마음으로 그 모두를 받아들이기로 다짐한다.
인간관계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자신이 없다. 사람이 험해지고 복잡해져서 이해하고 애등하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자신이 부요해지고 마음이 굳어지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결론은 나를 비우는 것이다. 내 마음이 가난해지고 슬퍼질 때, 보이는 사람이 다 귀하고 아름답다. 이해 못할 사람이 없고, 받아들이지 못할 행위가 없다. 마음 닦기가 공동체 가족과 하나 되는 출발이자, 행복의 디딤판이다.

지리산 두레마을은 따뜻하고 열린 공동체가 되고자 한다. 가치와 교리 그리고 성공과 성장으로 차가워지고 닫힌 세상에서, 나름대로 따뜻함과 열림을 유지하고 키워 나가고자 하는 공동체다. 그러기 위해 공동체 가족 한사람 산사람이 따뜻하게 열려고 고백하며 다짐하고 있다. 마을 식구 전체가 따뜻하게 열려지면, 손에 움켜쥔 흙먼지와 스치는 바람도 따뜻하게 된다. 차갑고 닫힌 세상에서 지친 또 다른 우리들이 이곳에서 따뜻하게 열려질 것이다. 공동체를 가족이라고 하지만 구속력이 없다. 제일 좋은 구속력은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를 구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레마을에는 규약은 없고,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인 고백과 다짐만 있다.

댓글목록

박덕수님의 댓글

박덕수 작성일

잘 보았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군요.좋은생각과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