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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또다른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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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장희 작성일04-04-07 14:25 조회1,73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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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를 보다가 생각해 볼 만한 글이 있어서 올립니다.
지난 주일 보았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많은 이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이 글은 또다른 시각에서의 \'돌아봄\'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누고 싶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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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빠진 예수의 수난은 \'빈껍데기\'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확실히 미국에서 예수는 인기가 있다. 6~70년대 반전과 반문화를 내세운 히피 문화가 한창일 때도 예수는 그 시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70년 초 등장하여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이다.

80년대 이후 역사적 예수 연구의 르네상스가 일어난 곳도 역시 미국이다. 현재까지 미국에서 한창 진행중인 역사적 예수 연구는, 상아탑에 갇힌 신학자들 간의 소일거리로서가 아니라 각종 일반 언론매체를 통해서 수차례 다뤄질 만큼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영화로 보자면, 국내에서는 철저히 홀대를 받았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1988년작 <예수의 마지막 유혹>도 논란을 일으키긴 했으나 미국에서만큼은 그런대로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안다. 그만큼 거반 기독교 국가나 다름없는 미국이라는 사회는 예수에 관심이 많다.

이것을 감안한다면, 최근에 나온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그리스도의 수난)가 흥행에 대박을 터뜨렸다는 사실에 그다지 크게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멜 깁슨이 바보가 아닌 한, 철저한 시장조사를 통한 수익구조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막대한 투자를 해가며 영화를 제작했으리라.

그런데도 이 영화에 관해 다뤄지는 여러 기사들이나 제작 과정을 보여주고자 기획된 영상물을 보면 멜 깁슨의 보수적인 독실한 신앙심이 무모하게도 이 영화를 제작하게 한 듯한 인상을 풍긴다.

라틴어와 아람어 사용이라든가 자막 없는 영화에 대한 고집 등을 그 근거로 들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지금까지 흔해빠진 예수 영화와는 차별화 된 뭔가를 보여줘야만 상업적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니 깁슨의 이러한 시도는 참신하다기 보다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만 보인다.

그렇긴 해도 <패션..>의 가장 큰 미덕은 오래 전에 사어가 된 라틴어와 아람어의 육성을 복원하여 사용한 데 있으리라. 성구를 판박이 한 것이나 다름없는 대사 내용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말이다.

감독은 주관적 해석이나 상상을 배제하고 최대한 성서에 있는 그대로의 예수를 그려내려고 했다고 한다. 숱한 자료를 뒤지고 역사적 고증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선전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수난사화를 재현해 내는 데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소품 사용은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것인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줄거리는 지극히 고루한 수준에 머물러있다. 뻔한 스토리로 이목을 끌려고 예수가 당하는 수난에 과도한 집중을 하다 보니 관객들을 넘치는 가학적 폭력 현장의 구경꾼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의도하고 있는 예수의 대속적 죽음이라는 이해와도 직결되는 문제다. 그러니까 결국 무엇인가? 로마 군병들에 의해 살점이 마구 튀어 떨어져 나가도록 채찍질 당하는, 육중한 십자가의 무게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수 차례나 넘어지는, 그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죽음을 죽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를 죽인 자들이든, 죽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며 지켜보는 자들이든 간에 예수가 흘린 피는 죄를 씻어주는 신비한 능력이 있음을 말하려는 것 같다.

그것은 빌라도의 아내가 마른 수건을 가져다가 마리아에게 건네면서 대리석 바닥에 흥건하게 묻은 피를 닦도록 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피한 방울이 떨어지면서 지진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그러한 의도를 쉽게 엿볼 수 있다.

예수의 대속적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영화는 당연히 예수의 죽음을 무미건조한 교리적 틀 속에 가둬버린다. 단적인 예로, 영화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나 요한 캐릭터만 보더라도 그렇다.

마리아는 자기의 아들이 채찍에 맞거나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장면에서조차 성모다운 품위가 손상되지 않은 선에서 그윽이 지켜볼 뿐이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악어의 눈물마냥 전혀 실감이 없고 감정마저 메말라 있다. 예수의 제자인 요한도 마찬가지다. 스승의 처형 현장 앞에서 초연한 듯 서 있는 그의 꼿꼿한 모습이라니!

예수가 처절한 고통을 당하고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했으며,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혀서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애써 강조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그것은 이미 널리 알고 있는 바이고 그보다 더욱 잔인한 고문과 참혹한 죽음도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일어난다.

요컨대 예수의 생애가 빠진 수난이란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 일 뿐이지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십자가 수난과 처형을 어찌하여 ‘대속’이라는 방식으로 이해했는지는 그의 생애를 말하지 않고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에 속한다. 예수가 벌인 하나님 나라 운동을 쏙 빼놓은 상태에서 보여주는 십자가의 처참한 수난은 일반에 \'마술적인 대속\'의 의미만 심어주기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예수를 닮고 그가 걸었던 길을 따르려는 자들보다는, 인간으로서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은 대속과 부활의 영광을 누리려는 신앙적 이기주의자들만 양산시킬 것이 불 보듯 훤하다.

벌써 복음서 자체에서 예수의 수난 이야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예수의 수난이 그를 따르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음을 능히 짐작케 한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에서 그의 죽음을 우리 자신의 죽음으로, 그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흔히 억울하게 죽임 당한 의인을 추모하려는 자들은 넘쳐난다. 그를 죽인 자들마저 기회가 닿는다면 추모의 대열에 합류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예수와 같은 억울한 죽임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수가 걸었던 정의와 평화의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려는 자들은 너무나 적다. 이것은 예수가 2천년이 넘도록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이유이다.

2004/04/02 오후 11:11
ⓒ 2004 OhmyNews

정병진 기자는 현재 여수에서 솔샘교회(http://solsam.zio.to) 담임 교역자로 일하고 있으며, 교회 내에 어린이 전문 도서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댓글목록

김전도사님의 댓글

김전도사 작성일

많이 공감이 가는 내용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