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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교회를 두고 몇년 간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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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동우 작성일17-05-28 16:17 조회1,0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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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쓴 글을 단순히 모은 것이라 표현이 적절치 않을 수 있지만 그 당시의 고민을 생생히 남기고 싶어서 가감없이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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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여러 세대가 모인 곳이다. 간단히 말하면 소년, 청년, 장년으로 구성된 3세대이다. 교회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그들을 분석하면 된다.   그렇다면 이제 해보자. 그러나 세대 간의 관계를 보아야 하며, 그들을 각각 독립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교회는 모래더미 같은 개인의 모임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의 삶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특히 어른들이 아이에게 영향을 받는 것보다는, 아이들이 어른의 모습을 본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주 자기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고 부모님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한다. 매우 복잡한 문제인데, 그들은 그렇게 계속 자란다. 그들은 그대로 자란다.  눈치 챘을 수도 있겠다. 교회의 미래를 말할 것이니, 그 미래의 구성원인 소년들을 관찰하지만, 또 그들은 청년, 장년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니 그 관계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교회의 예배구조. 공동체이며 전 세대가 함께하는 교회의 스타일이 사랑방교회를 어둡게 할 것이다.   어린이들은 그 특성상 몸을 가만히 두질 못한다. 몸을 움직이지 말고, 설교에 집중하라고 하면 그렇게 못한다. 그렇다고 움직이면서 말씀을 알아듣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어른들과 함께 듣는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 어렵다. 그들의 몸을 가두는 교회 의자와 선생님들의 따가운 눈초리, 무거운 분위기가 존재한다. 잠깐의 여유는 이런 압박을 뒤로 하고 친구와 떠드는 것에서 얻는다. 그런데 그들은 다시 어른들한테 혼날 것이다. 말씀은 그들에게 소음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은 무겁고 딱딱한 이미지로 교회를 기억할 것이다. 이 소년이 자라서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된다. 청년 세대부터는 어릴 때부터 자란 사람들과 새로 들어온 사람들로 구성된다. 교회에서 자란 청년들은 소년 때부터 쌓아온 어두운 이미지 때문에 교회를 결국 떠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교회에서 자란 뒤에 각성하고 교회를 떠나는가? 굳이 통계를 들먹이지 않아도, 주변에 그런 아이들이 충분하다. 이 정도는 예견이 아니라 현실 분석이다. 또 새롭게 교회에 들어온 청년들은 어떨지? 그들은 교회에 처음 들어와서 충실하고 싶다. 그러나 또래의 무기력한 분위기에 매몰된다. 또는 어릴 때부터 (교회가 보기에)바람직하게 자란 청년이라면 뭔가 시도를 하긴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적으로 열세인 대치상황이다. 물론 가끔씩 그들이 승리하여 교회 청년이 활발해지는 경우가 있으나, 그들은 한두명의 훌륭한 인간이고 그들 밑에서는 계속해서 어두운 소년들이 자라고 있다. 절대 불리한 싸움이다. 그런데 소년세대에서 영웅은 없는가? 부모님께, 교사들에게 칭찬 받으며 밝은 분위기 속에 자라나는 소년들은 어떤 경우인가? 그들 역시 수적으로 부족한 이유 빼면 영웅이라 불릴 이유가 없는 그저 교회에 종일 뿐이다. 그들은 교회에서만 사는 사람들로부터는 인정받으나, 오직 그들로부터만이다. 장년은 교회를 이만큼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이 뛰어났다고 해도, 모두가 훌륭한 자세로 교회 생활에 임하지 못한다. 흐트러진 모습이 대부분이고, 아이들에게 영향력이 없다. 그들도 교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아는 것이 없는 것은 힘을 약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하다보니, 어쩌면 모든 교회에 적용되는 말이 아니냐고. 그렇게 말하기로는 너무 약하지 않냐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방교회의 전 교인이 함께하는 예배시간에 대한 말이라면 설득력이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랑방은 그 예배의 딱딱함, 보편성을 지향한다는 취지의 건조한 예배가 특징이다. 그 것을 보완하기 위해 삶을 나누고, 예배 뒤의 밥을 먹고는 한다.  그러나 교회의 부차적 요소를 활성화해서, 교회의 핵심인 예배를 보완할 수는 없다. 예배를 제대로 회복하고 부차적인 것을 건드려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모습이다. 예배를 더 활기 찬 모습으로 드리는 것은,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을 배려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부되기 때문이다.  예배를 유하게 하고, 부차적 요소를 딱딱하게 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 그 자체다. 생각해보라, 예배를 드린 뒤의 형식적 인사와 나눔을 지향하는 교회가 사랑방인가?  변하지 않는 구조로, 10년 가까이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다. 이들이 자라서 청년이 되었고, 장년이 되어보라.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장년은 업적을 뒤로하고 사라질 것이며, 청년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여전히 교회를 떠나고 싶어하고, 소년들은 여전이 압박받을 것이다. 무엇을 바꾸어야 이 문제가 해결될지 생각해도 소용이 없다. 교회를 새로 만들지 않는 한 어렵다. 이 문제는 사랑방교회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예배와 삶의 모습으로 인해 생기는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면 더 이상 사랑방은 사랑방이 아니게 된다. 배보다 배꼽이 큰 해결책은 필요 없다.
201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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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사랑방교회 30주년 기념
사랑방 멋쟁이학교 6기 졸업생 김동우.

저 보다 7살 많은 형을 한 명 알고 있습니다. 형과 알고 지낸 지 거의 20년이 되는군요. 제가 올 해 23살 이고 아마도 유치원 다니던 때 부터 함께했네요. 제게 소중한 이 형은 본 받을 점이 많은데요, 특히 인품이 따듯하고 목적의식이 분명합니다. 또 이 형은 제 또래의 동생이 있는데요, 이 친구하고는 더 가까운 사이로 자랐고, 서로 많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죠. 이 친구도 자기 형을 닮아서 분명한 목적의식을 보입니다. 저는 이 형제와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제 또래의 다른 사람은 옷을 멋지게 입고 다닙니다만, 그들은 형제만큼의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심이 없고 그래서 방향이 없으나, 형제는 세상에서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형제의 일에 동감하는 사람, 그런 이들은 형제와 함께하길 원하는 거죠.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저도 어느 샌가 그 형제의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최근에서야 깨닫고 동참하고자 하는 그 목적은 제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일은 우리 존재가 매달려야 할 만큼 멋진 일입니다.

저는 진리를 어떻게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돌아보자면, 인간은 이제까지 객관주의적이거나 주관주의적으로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객관주의는 나로부터 나 외의 모든 것들을 너무 멀리 떨어뜨림으로써, 그 둘을 비인격적 관계로 만들고 서로 전혀 상관없이 따로 움직이게 만드는 사고방식입니다. 기계적인 근대의 산물이지요. 그러나 최근의 다양한 분야의 연구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심지어 자연과학적 지식마저도)진리는 공동체로써 존재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주관주의란 것은 시대에 적합하게 설명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 상황맥락에서 이해해야 하고 따라서 상대적인 사고방식이 됩니다. 누구도 틀리지 않았고 모두가 정답이지만,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리 앞에서의 또 다른 분리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존재할 수 없고, 아주 당연하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그 본래의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인간, 가슴에 진리를 품고 있는 인간은 공동체여야 합니다.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이기 때문에 특정한 사회적 방식을 취하고 살아왔습니다. 원시부족 형태로부터 왕이 다스리던 때를 지나고, (다른 관점에서는)자본주의로 혹은 공산주의 등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 인간의 공동체성을 잘 담고 있지는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와 함께 저는 인간의 가장 바람직한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므로, 지난 역사를 보면서 천천히 짚어가야겠지요. 이 글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금 복잡한 얘기들이 필요하니까요. 이 글은 형의 30년 생일을 기념하는 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함께하는 이들과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일을 확인하고, 또 우리를 따라올 이들에게는 알려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아시겠지만, 형제는 사랑방교회와 사랑방학교입니다.

마지막으로 멋쟁이학교 후배들이 어떤 목적으로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음을 압니다. 세상을 좁은 곳으로 보지 말고, 그 공동체성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멋쟁이학교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니까요. 대부분의 시간과 여행의 목적이 그것이니까요.
201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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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의 과제
1.

시대마다 고유한 질환이 있다. 이를 테면, 페스트의 시대가 있었고, 성 억압에 의한 신경증의 시대가 있었다. 이것들은 항생제와 프로이트의 등장으로 힘을 잃었다. 물리적, 심리적 외상에 의한 인류의 시련은 지나가고 우리는 새로운 증상과 대면하고 있다. 이 새로운 것은 내상이랄까 근본적인 것이랄까 어쨌든 인간의 중핵을 건드리고 있다. 중핵이 침식되고 있거나 심한 경우 완전히 그렇게 된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고대로부터 이미 다루어져 왔다. 생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죽기 직전 나의 인생을 어떻게 돌아보게 될까? 인간은 어떤 목적을 바라는가? 기독교인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나는 왜 사는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교회는 왜 출석해야 하는가? 이웃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신은 곧 여호와인가? 여호와의 복음이 무엇인가? 나는 구원받았는가? 왜 구원 받아야 하는가?  21세기 전 예수가 어떻게 21세기 뒤 우리를 구원하는가? 구원 받은 자와 아닌 자는 어떻게 다른가? 하지만 내상의 진단과 치료보다는 외상의 것이 더욱 급하게 생각되었으므로 그것이 우선 처리되었고, 이제서야 새롭게 등장한 것처럼 보이고 있다. 여전히 유의미한 답을 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 대해 빅터 프랭클은 \'의미 상실\', 사라 리틀은 \'마음의 실향\', 한 병철은 \'피로사회\' 등으로 규정하였다. 잠깐 외상의 문제에 다시 눈을 돌려보면, 우리 시대와 가장 가까운(우리 시대는 아닌) 때에 이 외상을 진단한 이 중 마르크스는, 사회의 자본구조가 인간 개인을 규정짓는다는 기발한 관찰을 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선배들은 그의 진단을 받고, 여러 갈래로 나름의 치료를 진행하였다. 어떤 이들은 투쟁을 하였고, 누군가는 기도를 하였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 그러했듯이 민주주의에 주목하고 이를 경제적 문제랄까, 마르크스적 질환에 대한 처방으로 삼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치료는 유효하였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아직 완치된 것은 아니다. 주의할 것은, 외상이 흔히 그러듯이 마르크스적 질환도 트라우마를 남겼고, 어떤 이들은 여전히 그로 인한 도착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 도착은 돈에 대한 (더 심각하겠지만)아쉬움이랄까 그런 잔여물을 남겼다. 그러나 계속되는 도착은 치료에 장애물이 되며, 우리는 마르크스적 질환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해야 한다. 물론 20세기에는 마르크스 외에도 다른 많은 의사들이 있었다. 병리적 존재로서 히틀러도 그러했고, 더 많은 다른 의사들이 있었다. 그 의사들의 처방을 열거할 필요도 없을 만큼, 우리는 현대 전쟁과 잔혹한 역사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다양한 의사가 제각기의 진단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괜찮다할 만한 성과를 볼 수 없었다. 그것은 곧 깊은 \'회의감\'과 \'절망\', \'무기력\'에 우리를 빠뜨렸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이 시대의 증상이다. 우리는 질환사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내상은 계속 있어왔다. 그럼에도 외상을 다뤄왔지만, 이제는 내상이 긴급한 문제로 부각된 것이 우리 시대다. 물론 20세기 의사들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표면적인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종교의 근거나 경제적 하부구조 혹은 인간의 무의식 등에 관심을 가졌던 태도다. 물론 그들은 한걸음 부족한 상태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표면의 문제를 들추었지만, 여전히 중핵에 다다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 시대의 증상은 역사적이면서도 또한 인간의 근본으로부터 기인한다. 우리 시대는 \'의미 상실\', \'마음의 실향\', \'피로사회\'등으로부터의 \'회의감\', \'절망\', \'무기력\' 등에 시달리고 있다.

2.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개혁에 큰 기둥이었고, 우리가 뿌리를 두고 있는 종교개혁자 칼뱅의 말이다. 한편, 교회는 인류의 \'원죄\'를 해결해주는 위대한 치료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따라서 자생적이랄까 상호내적관계를 통해서 치료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치료자 예수의 제자로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질환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사랑방교회는 이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20세기적 도착을 해결하였다. 특히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던 1980년대의 한국의 상황에서 그랬다. 삶을 나누며 사는 것, 그러니까 물질주의 개인주의 성공주의 등에 상처받은 이들을 품어주는 곳이 되어 주었다. 허나 단순히 말해서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으며, 지금 우리 특히 다음 세대인 청소년 및 청년에게는 무엇인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사랑방교회의 전통과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우리 문제의 답을 찾을 수 있다. 삶을 나누는 가운데 우리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 기대된 바였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나의 진단이다. 이렇게 질문해보자. \"1980년대 문제에 대한 사랑방의 해결이 우리 2016년의 문제에 대해서도 유효한가?\" 인권이 탄압되고 밥 한그릇 먹기 힘들었던 시대. 이상적인 상태는 아니지만, 이런 것은 일정 부분 완화되었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시대의 문제는 보다 직접적으로 인간의 중핵에 걸려있다. 이에 대한 답을 2세대에게 명시하는 것이 사랑방2016의 과제다. 새로운 문제는 새로운 해결이 필요하다. 고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거시적이든 미시적이든, 개혁이 필요하다. 이것이 처방의 요약이 될 것이다. 주의할 점은 개혁은 항상 진보지만, 사실 전통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므로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자던 르네상스나 성경을 재조명한 종교개혁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이 시대의 문제도, 이렇게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일련의 시도들(당시 사람들은 그것이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라고 보았다.)이 실패하자 좌절에 빠지고 혼돈이랄까 공황이랄까 그런 증상을 갖게된 것이다. 이제 흥미로운 점이 생기는데, 우리의 증상이 근본적인 것인 만큼, 치료(처방)도 근본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방교회의 시작도 교회의 근본이랄까 참된 전통을 회복하려는 개혁적 운동이었다. 더하여, 모든 것은 통하게 마련이다. 작은 여러 물줄기들은 흘러흘러 큰 바다로 모인다. 그러므로 사랑방의 전통에 충실하면 우리의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전통에 힘입어 직면한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 당연하다. 한편, 나는 사랑방교회가 종로에 있을 때부터 여기서 자라고 배웠다. 나는 사랑방 교인이다. 그런 내가 21세기 현대인들의 증상을 겪고 괴로워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사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 그러한 증상을 두고 적합한 치료를 받지 못했다는 불만이 있었다.

3.

질환에 대한 치료기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제거와 삽입이다. 이러한 두 기술은 20세기 중후반에 크게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제거의 경우 2차대전의 그늘 아래에서 그랬다. 그러니까 독일, 일본식 의학의 발전인 것이다. 우선 인체를 해부하였고, 신체기관의 일부를 제거한 뒤의 경과를 지켜보는 것이 그들의 방법이었다. 제거술은 그러니까 일종의 해체 및 분리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뜯어놓고 보니 그들은 \"인간도 별 거 없네\"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과관계든지 병행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사실상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이러한 \'실망\', \'불신\', \'회의감\'은 2차대전적 제거술이 발전할 때 즈음해서 힘을 발휘한다. 이에 대한 철학적 사조는 포스트모더니즘 특히 해체주의에 기인한다. 사실 이는 철학사를 들여다봐야하지만, 이것은 앞서 간단히 설명하였으므로 넘어가려 한다.) 제거술에서 나아가 삽입술은 보다 인간적인 관점에 기인한 의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외과적 진행은 해체로부터 시작하겠지만. 무언가를 삽입한다는 점이 다르다. 인공관절이라든지, 치아 임플란트, 안구렌즈 삽입 등이 그런 것들이다. (긴급한 제거술과 달리, 삽입술은 신체의 향상을 위한 방법이다. 삽입술은 제거술의 한계와 나노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어쨌든 현대인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삽입수술을 받으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제거, 삽입술이 신체적 문제에만 적용되는 치료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현대의 내적인 문제를 위해서도 제거와 삽입은 필요하다. 내면의 문제에 있어서도, 없애야 하는 것이 있고 넣어 주어야 하는 것이 있다. 잘못 심겨진 마음의 뿌리는 뽑고, 교회의 정당한 가르침을 심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의미 상실\', \'마음의 실향\', \'피로사회\'에 대한 나의 처방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정당한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암시된 바, 기독교 그 자체다. 기독교회의 전통, 교리, 공동체, 삶 등 그런 가르침이 마음에 심겨지고 튼튼하게 자라나면 \'무기력\', \'절망\', \'회의감\' 등의 증상은 사라질 것이다. 기독교의 어떤 부분이 치료과정의 촉매가 되어줄지는 내가 다시 교회교육 현장에 뛰어들 때, 그 필요에 따라 구체적으로 정리해 볼 생각이다. 그럼에도 간단히 한 관점을 보여주자면, 기독교의 전통, 성경, 이야기가 내 삶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그러한 이야기를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나 또한 증언할 수 있으니 힘이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럼 어떻게 교회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까? 교육학에 있어 비계설정(Scaffolding)은 중요한 원리이다. 그것은 가르침의 과정 가운데 적절한 지지대를 설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적절한 지지대는 많이 만들 수도 있고, 시공간의 제약이 있다면 줄일 수도 있다. 허나 포기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지식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독교가 무엇을 말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안셀름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고 하였다. 교회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맹목적으로 아멘을 외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마치 감기에 걸린 이가 약명만 감기약이고 성분은 전혀 다른 약을 흡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들으면서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의미, 목적, 방향, 원인을 잃어버린 이에게 지식적 토대를 다져주는 것은 나무를 심고 주변 땅을 밟아주는 것만큼 중요하다. *1주일 뒤의 첨언. 지식이 신앙의 토대가 되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식 자체가 나무라고 보여진다면, 코이노니아 생활이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까 나무는 지식이고 그 토양은 코이노니아 생활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 난관이 있다. 그것은 삽입과 동시에 제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며, 외과적 수술에 있어서도 (각 시술의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이것은 꽤 까다로운 경우에 속한다. 허나 외과적 수술은 눈에 보이는 물체를 없애고 다른 물체를 넣어주면 되지만, 인간 내면의 문제는 그렇게 논리적으로 진행되지만은 않는다. 즉 제거와 삽입의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 메커니즘은 희석이랄까 점진적이랄까 꾸준한 삽입으로 인해 제거될 대상이 녹아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어떤 이들은 한순간에 과거의 모든 죄가 씻겨지고, 새 믿음이 생긴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맹신이고 교만을 낳기 쉬운 태도다.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맞다. 그러나 100이었던 것이 -1씩 줄어들다가 최후의 1에서 0이 되는 이 한 순간에 주목하여, 그것만을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 감나무 아래에 누워 입벌리고 있는 만큼 게으른 것이다. 타당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적 이해가 계속 삽입되며, 그것이 곧 제거될 대상을 조금씩 무너뜨리게 될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제거될 대상이 무엇인가? 교회의 가르침이 성분상 그것을 희석시킬 수 있는 작용력을 갖는가? 그렇다. 그 제거대상은 원죄라고도 하며 교회라는 병원의 전문 진료과목이다. 예를 들면, 돈, 건강을 주인으로 삼는 등이다. 그것을 쫓아 사는 삶은 제거해야 할 가치, 태도이며 그 과정은 타당한 삽입을 꾸준히 함으로 진행될 수 있다. 돈이 삶의 의미, 목적, 방향, 원인이 된 이에게 바람직한 대체물을 제공해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허나, 인간의 내면은 복잡하여 들이붓는다고 다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두려운 마음이랄까 괴리감이랄까 그런 방어기제가 작동할 수 있으므로, 코이노니아적 교회 생활을 통해 그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기다려야 함도 기억해야 한다.*1주일 뒤의 첨언. 지식의 삽입에 있어서 코이노니아는, 지식의 침투를 거부하는 이의 면역반응을 완화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
201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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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교회의 정당한 가르침에 대하여.

교회는 교회에 속하기 위해 온 이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갖는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배우길 원하는 것이다. 이때 접근법이랄까, 과정에 있어서. 영유아부터 노인까지 모두 통합 예배를 드리는 것은 훌륭한 교육적 방법이다. 하지만, 그 수준차이가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한 마디로 신앙의 발달단계가 있는 것이다. 우선 정 태일 목사님은 신앙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상태고, 그 뭐랄까 이미 높은 곳에서의 평안함이라고 하면 좋을 그런 설교를 하신다. 그래서 깊이 있고 넓다. 그래서 어린 사람들이, 삶의 경험이 부족한 이들이 듣기에도 큰 무리가 없다.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깊이와 정 태일목사님의 깊이는 분명 다를 것이다. 신앙의 이전단계에 있는 이들은 보다 구체적이고 치열한 신앙의 질문과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이 부분은 굳이 말 안해도 된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다른 의도도 있겠지만) 성경공부 모임을 하는 것이다. 각 수준에 맞는 이들끼리 모여서 삶의 현장을 나눠보자는 취지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성경관찰,의미탐구,적용의 모습은 오직 지금의 정 목사님 것을 두고 모델로 삼는다. 그러니 원래는 주일예배 설교에서 큰 그림을 잡고, 성경공부에서 서로 작은(작지만 큰) 얘기들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높은 차원의 신앙의 결과물만 두고 그 모양을 모방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뭔가 괴리되지 않은 괴리감이 느껴진달까. 그런 것이 있다.
201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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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교회와 직장선교학교의 난제.

사랑방교회는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교회로써, 하나됨을 지향하고 삶을 나누는 원리에 따라 교회의 참 모습을 회복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곳이다. 한편, 직장선교학교는 말씀에 충실한 제자를 양성하는 단체로써, 말씀 연구를 중시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곳이며,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두 건강한 교회의 닮은 모습은, 교회와 제자의 참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는 목적에 있다. 허나, 한 가지 모호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난제는 아니고 잠시 들여다보면 금방 조화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것인데, 사랑방교회는 교회의 각 지체인 성도들이 각자 주신 역할과 능력에 따라 한 몸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을 추구하고 있고, 직장선교학교는 모든 사람들이 부차적인 일을 내려놓고 말씀에 충실한 제자가 되길 원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이 난제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직선학에서는 각 지체의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하나의 일에 종속시키는 것이기 때문인가? 사랑방은 제자를 예수의 가르침에 없는 부차적인 일에 종속시키기 때문인가? 그러나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그러므로 사랑방도 하나이요, 직선학도 하나이요, 둘이 서로 하나일 것이다. 저렇게 모순으로 보이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방의 지체로서, 직선학의 제자로서 이것은 나의 과제였다. 다음의 두 가지 과정이 원하는 결과를 보여줄 수 있다. 첫째, 사랑방이 제자를 지체화하여 부차적인 일들(예를 들면, 교회에서의 사소한 봉사에 순종하게 하거나 사회에서의 직업에 근무하는 것)에 헌신하게 함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각 지체는 받은 은사와 능력에 따라 봉사하도록 부름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방의 관점이 아니라, 각 지체들은 개인의 구체적으로 주어진 상황들에서 말씀사역을 하길 원하는 것이다. 교회에서의 사소한 봉사는 또 다른 지체가 말씀 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사회에서의 근무는 아직 사랑방에 남아있는 모습이지만, 그것은 현실사회에서의 한계를 아직 극복하지 못해 품고 있는 문제일 뿐 그것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사회근무를 포기하고 말씀에 충실하기 원하는 이들을 위해 사랑방공동체 안에 \'디아코니아\'라는 또 다른, 조금 특별한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고, 이들은 사회근무는 전혀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방의 지체론은 각 개인의 은사와 능력에 한계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충분해지고 오히려 분명해지는 것이다. 둘째, 직선학이 지향하는 바(말씀에 충실한 제자가 되어 말씀사역자로 살아가는 것)는 결국 무엇인가? 말씀사역자로 충만하여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제자들이 모인 곳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그 모습은 하나님이 이 사회에 원하시는 것 즉, 건강한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만약 이 말이 맞다면, 직선학의 제자들은 깊은 말씀 묵상과 해석 이후에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나가고 그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랑방을 세우신 목적과 접점을 가지게 되는 부분이 된다. 고로 직선학과 사랑방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하나된 형제다.
20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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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장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대하여.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모습을 갖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움은 당연 바람직한 것이고, 차갑다면 곧 그 무의미함에 질색하여 돌이킬 기회가 찾아올 텐데. 미지근한 모습은 뭐랄까 역동적이지 않고, 좋게 표현하면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말하지 않는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이 결코 원하는 모습이 아님을. 그런데 미지근한 것이 항상 온도의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위아래로 움직이긴 하지만 그 횟수가 거의 0에 가깝거나 어쩌면 그 변동의 폭이 거의 0에 가깝기에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감정이나 신념이 절대고정되어 있는 경우는 없다. 아마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의 온도에 있어서 변동은 있으나 어느 쪽으로도 결코 더욱 진전하지 못하고, 게으른 모양으로 곧 본래 상태로 돌아가곤 했던 것 같다. 아주 생명이 없긴 싫고, 그렇다고 뜨거우려니 열 내기는 귀찮은 것이었겠지 싶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오직 라오디게아 교회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사랑방교회는 어떤가. 우리의 어른들, 사랑방 1세대는 뜨거웠고, 하나님 보시기에 기쁜 일을 일궈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 청년들과 새식구들이 그것을 이어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 젊은이들이 열심을 내보려고 하지만, 곧바로 식어버리고 만다. 교회에서 뜨거운 운동이 일어나려면, 자명하게 성경공부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특히 사랑방교회의 힘은 성서모임에 전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보는 게 정론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얼마나 다른가! 젊은이는 대부분 성서일기의 중요성을 이론적으로 알고는 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떤가.

물론 젊은이들의 성서모임 시간, 지금 하고 있는 시간은 주일 예배 후인데, 그 때는 교회 특성상 유난히 회의나 기타 행사가 많다. 교회와 학교 그리고 공동체, 훈련원 등을 운영하고 있으니 예배 후에 회의가 많을 수밖에 없다.(다른 교회와 조금 다른 것이 사랑방자체는 이것저것 부차적인 행사를 싫어한다. 성경공부도 성서모임만 잘 이뤄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구조상 어쩔 수 없이 회의가 많다. 이것은 부차적이지 않고 충분히 중요하다.) 유아, 초중고등 학생들은 그 시간에 고정적으로 방모임을 하지만 우리 청년들은 그 동생들을 위한 교사로 섬기거나 곧바로 회의에 참석해야 되거나 하는 상황에 있다. 또 젊은이사랑방을 맡아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목사님으로서 어쩔 수 없이 모임에 불참하고 남은 젊은이들로는 영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곤 한다. 꽤 자주.

물론 이것은 핑계, 변명이다. 주일에 하는 모임은 사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시간이라기보다는 한주간의 묵상과 삶을 나누고 교제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젊은이들이 주일이 아닌 날에 열심히 성경공부를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사람이란 불완전하고 약한 존재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사람은 \'자기 말을 하고 싶어한다\'는 성향을 떠올릴 수 있다. 즉, 한 주간 열심히 공부하고 살아온 것을 나눌 피드백과 그로 인해 얻는 즐거움이 없이, 그리고 이런 것이 반복되면 성서일기에 대한 열심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까 교회 구조상 그런 피드백의 기회가 종종 상실되곤 하는데, 따라서 젊은이들의 매일성경공부에 대한 열심이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가끔씩 찾아오는 성경방모임 기회에 사역자께서 과욕(?)을 부려 많은 지식을 전달해주려 하고 말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청년들의 성경해석을 옳든 아니든 다 들어보고, 토론하고 지식의 전달이 이뤄지면 최선인데, 알다시피 많은 모임 때문에 단기간에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물론 삶이 죽을 만큼 힘들어서 생명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이라면 누군들 성경을 읽고 탐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피상적인 말이다. 요즘 한국사회가 정말 굶어죽을 듯이 가난하거나, 전쟁과 테러가 주변에 도사리고 있거나 하여, 실제적인 삶에 위협을 주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위 말은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자들이 주로 하는 고백이다. (쉽게 꺼내긴 무거운 주제지만) 북한과 같은 곳에서 말이다. 우리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극혐의 상황에 처해있지 않다. 어쩌면 그럴 수 없다고 해야할까. 그러니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말씀을 읽지 않고는 못 버틸 텐데\"라고 하는 비난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충분히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하지 않는 이유. 열심히 해보자고 하던 몇 젊은이들의 열기가 금방 식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말했듯이 교회 구조상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개개인의 상황이 그만큼 절박하지 않음도 한몫할 것이다. 이렇게 평일에 성경공부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분석이 어쩌면 이미 핑계와 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가져야 마땅한 주일 성서모임 시간의 확보와 말씀 없는 삶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 급박한 위험에 처한 것임을 지각시켜주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라고 일러준 것이 된다면 다행이다.

전자의 작업은 모임시간 조정, 교회의 구조를 건드리는 조금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성경이 스스로 말하도록 해야 가장 바람직할 것인데 그러한 신적인 성령의 일에 도구로 쓰일 만한, 그것을 일러줄 만한 자격이 있는 자가 등장해야 할 것이다. 그 자격은 아마 성경에 능통하지 않고서는 얻기 힘들 것 같다.
201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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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교회』, 사랑방공동체 다음 세대를 위한 부록

  “…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요일 4:12>

  사랑방공동체는 그리스도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를 위해 코이노니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사랑방공동체는 32년의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이는 많은 분들의 헌신과, 그 과정에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나고 자란 2세대들이 젊은이가 되었고, 미래를 함께 준비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저는 그 가운데 한 지체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사랑방공동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부끄러운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다만 이곳에서 자란 한 아이로서 느낀 점을 형, 누나, 동생들과 공유하며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사랑의 마음으로 가르쳐 길러주신 분들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뿐입니다.
  이 작업을 위해, 사랑방공동체 지도자 정 태일 목사님의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교회』에 대한 참고적인 부록을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2016년 7월 김 동우 젊은이

1. 사랑방공동체의 두 가지 근거

  사랑방공동체는 두 가지 근거, 즉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사랑방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고자 할 때에 핵심적인 내용이 됩니다.
  먼저 사랑방공동체는 교회의 본질을 추구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함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코이노니아로 가능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랑방공동체는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교회가 됩니다.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교회로서 사랑방공동체는 다음의 세 가지 고백을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터전이라고 믿습니다. 또 세상의 역사에서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도구인 것을 믿습니다. 결국 교회는 개인이나, 사회, 인류적으로나 모든 문제의 답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 고백들 특히 세 번째는 두 번째 근거로 이어집니다.
  즉, 사랑방공동체는 이 시대의 메시지입니다. 정 태일 목사님은 오늘 우리 사회는 “인간의 비인간화, 인간상실, 그리고 인간소외의 문제에 부딪혔다. … 실업과 좌절의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 이념에 의한 민족의 갈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전히 이러한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주신 답을 온전히 따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바, 교회는 여러 문제에 대한 열쇠인데 그 핵심은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2. 두 근거 이해하기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사랑방공동체를 이해하려면, 위 두 가지 근거에 대해 조금 더 파고들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정 태일 목사님의 글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 제일 바람직합니다. 제가 하려는 것 역시 그러한 작업입니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는 수준입니다. 앞으로의 글 내용 또한 그 정도의 깊이일 것입니다. 부족한 안목으로 인해 제가 생각하는 것이 사랑방공동체의 방향과 어긋나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목적한 바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상황이 더욱 심각해서 완전히 벗어난 말을 하고 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즉시 제 의견을 취소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고후 13:13>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모인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그것은 곧 성경이고, 성경의 내용은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와, 성령의 사귐에 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사랑이고, 그 최선의 방법이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동사로써,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느낄 수 없고 사랑은 없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 합니다. 가능한 가장 좋은 것, 최고의 선을 주고자 합니다. 사람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만큼, 남을 사랑할 수 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한 이야기(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된 소식, 예수님이 그의 삶을 통해 전하신 내용이고,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코이노니아로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누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는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코이노니아를 지향하여, 화목하고 조화롭게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행복하게 산다고 해도 하나님과 그의 사랑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것은 인본주의적, 이데올로기적 사회일 뿐, 성령의 코이노니아는 아닙니다.
  또 한편으로는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교회라고 해서 항상 평화롭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에는 고통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땅에 있는 하늘나라는 땅에 있기에 고통이 전제됩니다. 초대교회에도 고통, 현실적인 어려움은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들의 삶이 땅에 있는 하늘나라였다는 것은, 땅에서 고통이 생겨나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코이노니아로써,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갓난 아기가 걸음마를 떼는 것은 그 나름으로는 많은 노력의 결과입니다. 위의 내용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신앙이지만, 이제야 깨닫고 있는 저를 보고 당황하지는 않으실 줄 압니다.

  “…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벧전 3:15,16>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는바 윤리, 도덕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명확히 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 기초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답하면서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신은 있는가. 그 신이 기독교의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창조주인가. 피조물은 목적을 갖는가. 우리는 타락했나. 세상에 고통은 왜 있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신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무엇인가(예수인가). 예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코이노니아는 무엇인가.
  각 사람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게 되는 과정은 다릅니다. 하지만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 자료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만, 제일되는 것은 성경입니다. 우리가 하는 성경공부는 삶의 질문들에 답을 찾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연역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어떤 말씀에서 깨달을 것인지는 다릅니다. 그래서 귀납적인 방법이 더욱 효과적입니다. 귀납적인 성경공부는 상대적이지만, 상대주의적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한 뜻을 가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법도 많으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성경공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랑방공동체는 모든 모임에 성서연구를 약속에 포함하여 정해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코이노니아를 지향한다면, 친밀한 교제만큼이나, 성경공부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시대의 문제에 대하여

  이런 사랑방공동체는 곧 두 번째 근거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근거는 교회 자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에 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제가 다 논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방 2세대인 청년이 된 젊은이들의 문제(이것도 꽤 넓지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잘못 진단한 것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삶을 나누는 정도의 관심을 부탁합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비인간화, 인간소외입니다. 또 다른 문제인 경제적 어려움은 인간상실을 초래하며 악화시키기에 심각한 것입니다. 또 각 사회의 신념이 충돌하는 것도 인간소외를 돕고 있습니다.
  비인간화, 인간소외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사람됨을 잃는 것, 사람을 옆으로 물러서도록 하는 것. 곧 인간의 죽음이란, 의미를 잃은 것입니다. 신체적, 사회적 고난을 겪지만,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목적을 잃고 방황할 때, 끝내 머물 곳을 찾지 못할 때 정신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정신이 죽으면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사람의 정신이 그렇게 죽어가는 것, 곧 인간소외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고향을 찾아주고, 쉴 곳을 마련해주면 곧 회복하고 인간답게 살아갑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을 통해 마음의 고향을 얻었습니다. 또 기독교회는, (사랑방)공동체는 몸의 고향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다른 종교 신앙이나 공동체를 만날 수도 있고, 거기서 쉼을 얻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로서는 가까이 있는 토대를 붙잡고 스스로 살려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다음에 탐구해도 늦지 않고 건강한 방법이라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딛고 일어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며,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따라 사는 것은 그러므로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그것은 삶의 의미를 알려주어 인간소외를 해소해줍니다.
  너무 추상적이라서 물리적 현실이 만들어내는 경제, 정치, 문화적인 인간소외의 문제에는 소용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약한 우리로 가장 소중한 것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좌절시키는 것들을 없애기 위해 협력하는 모습이 나타나리라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정치, 사회, 문화적인 일에 모든 인생을 바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 최선이 되는 사랑 없이는 허울 좋은 일입니다. 사랑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랑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하는 것은 진지하지 못한 것입니다.
  각 사람들은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어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큰 방향이 되어 각자 받은 은사대로 할 수 있는 일로 돕습니다. 어떤 활동이 이 목적에 부합하여, 자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노력할 마음을 줄 것인지는 각자가 다릅니다.
  저의 경우는 정치학이나, 컴퓨터나, 디자인이나, 체육이나 음악 등에 받은 것이 적고, 한편으로 몸으로 헌신하기로는 게으르고 교만해서 부끄럽게 생각하고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우선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으로 글을 써봅니다. 믿으며,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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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다음세대를 위하여2

  하나님께서 사랑방과 항상 함께 계시는 줄 믿습니다. 요즘 하는 고민은, 제가 사랑방의 지체이기에, 다른 지체들과 공유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청년들, 다음 세대들과는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꾸러기 학교를 다녔고, 멋쟁이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꾸러기, 어린이, 푸른꿈 사랑방에서 그리고 성인이 된 후로 늘푸른, 이제는 젊은이 사랑방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청년의 침체, 사랑방공동체 다음 세대에 위기가 왔습니다. 한국교회의 흐름 가운데서 우리를 비추어볼 때 이것은 심각하고 중요한 상황인 것이 명백하고, 저에게는 또한 고향과 가족의 문제이기에 절실합니다.
  제가 보고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성서일기를 하지 않습니다.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방모임에서 삶과 말씀을 나누지 않습니다.
  개개인의 상태가 이보다 나을지 나쁠지는 불확실한데, 이미 그런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방모임에 삶과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랑방 다음세대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혹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 해도, 초보적인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도 불과 얼마 전까지 신앙의 초보거나, 신앙이 없지 않았니? 너가 돌이키듯이 다들 돌이킬 거야.” 성령의 자연스러운 역사를 소망하며, “기다려.” 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방치와 기다리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면서 기다립니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양한 지체가 있는데, 이것을 총체적 위기로 보는 것은 너무 과민한 것 같아.” 많은 것이 다양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의 문제는 ‘예 또는 아니요’라고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게는 신앙교육이라는 긴급한 문제가 새삼스레 대두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생활, 활동양식 또는 도덕, 윤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에 전제되어야 하는 신앙의 유무 여부와 관련된 것입니다.
  사랑방 교회는 1984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사회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던 때입니다. 인간적으로 존중해주는 것,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 권력의 구조를 벗어나서 평등하게 서로를 대하는 것, 평화로운 교제를 원하는 것이 그 시대의 과제였습니다.
  사랑방 교회는 그러한 시대의 요청에 대답하며,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신앙생활의 모습과 방법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90% 이상이 1984년에는 미처 태어나지도 못했습니다. 어찌됐든 선배들의 노력으로 우리가 사는 시대는 보다 인간적인 곳이 되었습니다. 물론 1984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조차도 눈속임일 수 있습니다. 어찌됐든, 이제 우리 젊은이는 1984년의 문제를 거의 문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 부딪혔습니다. 한마디로 1984년이 아니라 2016년의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로서 이웃을 어떻게 대할지 고민하는 방법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생각과 비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눈에 보이기에)물리쳐야 할 권력이라는 괴물도 상대적으로 조용해졌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생각들이 다양한 것을 향해 나아갑니다. 절대적인 것이 무너지고 “신은 죽었습니다.”
  사랑방 다음 세대 가운데 신은 죽었습니다. 이 말을 공감할 수 있는 친구들과 가족은 이미 많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신앙의 건강한 모습이 아니라, 신앙 자체가 없어질 위기에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데, 성서일기와 방모임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신앙이 없는데, 신앙의 모습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사랑방은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관계라는 것이 지체 간에 서로 온화한 성품으로 갈등을 조장하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것은 신앙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신앙 없이는 바리새인의 허례허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방법에 더하여, 신앙의 내용입니다. 기독교가 하는 말이 타당한지, 믿을 만한지, 이 시대에 다양한 사조들과 무엇이 다른지, 그것들보다 더 괜찮은 얘기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성경공부를 하면서 해결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행동하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문제의식이 있다면 고민하고 답을 찾기 위해 기도하고 공부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성경을 보고 신앙을 얻으려 노력하지 않는 것은 이미 충분한 답을 가지고 있거나,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충분한 답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초보적인 신앙과 단순한 믿음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가능한 방법이 있습니까?
  또는 기독교가 답이 되지 않아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믿고 있는 것이 정답, 최소한 방향이라도 지시해준다는 것을 알려줄 방법이 있습니까?
  한 가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유태인들의 교육방법은 ‘하브루타’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조용히 혼자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 시끄럽게 대화합니다. 유태인들의 대학 도서관은 정숙 개념이 없이 시끄러운 시장 같습니다.
  이 방법의 원리는 상대방이 계속 자기에게 도전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자기 스스로를 점검하게 되고, 보완하게 됩니다. 서로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성도의 관계는 신앙에 대하여 서로 간에 하브루타의 파트너가 되어주는 것이 포함됩니다. 친구의 신앙 성숙을 돕는 관계가 코이노니아에 들지 않겠습니까?
  멋쟁이 학교를 다니면, 성서일기를 매일 합니다. 하지만 6년간 제 성서일기 묵상은 피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의 신앙이 충분한 것인지 초보적인 교만인지 확인하도록 제 묵상을 두고, 그 당시에 진지하게 되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성서일기 모임은 한 사람이 시간을 독점해서 사용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각 지체를 모두 존중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의 묵상에 대해 질문하거나 코멘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모이는 대로의 성서일기를 바꾸자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장단이 있습니다. 그저 바라기는 (굳이 하브루타 파트너라고 부르지 않아도)신앙의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방에 그런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이런 관계에 좀 더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사랑방공동체는 그리스도인의 교회이며, 다음 세대 또한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믿습니다. 아멘.
201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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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포스트모던 교육

\"전통적인 교회교육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교육과 4년을 마치는 최종 시험 문제였다. 박상진 교수님의 기독교교육과정 시간이다.

전통적인 교회교육이라. 그걸 어떻게 비판해야 하는지 15주 동안 배웠다. 모더니즘을 전통적인 패러다임으로 규정하고, 그에 따라 모더니즘에 기반한 교육과 기독교교육을 비판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셨다.

모더니즘을 묘사해볼까. 현실적으로는 산업혁명과 사상적으로는 데카르트적 사고에 힘입은 이 시대는. 이성, 논리, 과학, 지식, 실험, 관찰, 객관주의, 수량화, 단순화, 획일화 등의 개념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기반에서 기독교교육은 본질을 찾기 어려워진다.

기독교교육의 핵심은 단언코 \"신앙\"이다. 박상진 교수님은 신앙을 \"하나님 알기\"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에 대한 논의는 \"인식론\"의 문제로 연결된다.

모더니즘은 편협한 인식을 자연스레 수반한다. 그에 반해 기독교교육은 이제 \"인격적\", \"참여적\", \"공동체적\", \"상상적\"이 되어야 한다.

세상은 사람의 이성과 논리로만 바라볼 수 없다. 통전적으로, 온 것을 통하여 파악하기 때문에, 근대적 패러다임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흔히들 말하듯이 감히 \"하나님을 인간의 머리에 가두려는\" 시도로 보인다.

분명해 보인다. 모더니즘은 세계대전을 생각해보면 그 귀결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세계대전을 통해 우리는 이성의 이기적이고 잔인한 얼굴을 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접어들게 된다. 물론 세계대전이 유일한 계기는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인 것이다. 근대 산업혁명이 영국의 방직공장의 운영으로 시작되었다고 논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세계대전 전에도 사상적 토대는 밑에서 조용히 그러나 벌써 형성되고 있던 것이다.

어찌됐든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변했는가. 우리는 일종의 노이로제를 겪고 있다.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곧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 사람에게 보이는 증상은, 스스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은 A로 인해 불편하고 어렵다고 믿는다. 하지만 문제를 더 정확히 파악해보면, A-1 때문에 그렇고, A-2와는 상관이 없는데 그걸 전부 A로 묶어서 생각하는 것이다. 또는 B에 집중할 것을 A에 집중하는 양상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정반합\"의 길을 따라 앞으로만 가다가, 겸손해지고 관용을 베풀 줄 알고, 주변 사람을 돌아보고, 소수와 약자를 배려해준다. \"똘레랑스\"와 \"좋아요\"가 현대사회를 대변해주는 키워드이다.

긍정사회는 우리를 \"좋은 곳\"으로 이끄는 듯 보인다. 그러나 거절 없는 긍정은 긍정이 아니다. 매끄럽기만 한 것은 어떤 깊은 주름도 만들어낼 수 없다. \"코이노니아\"는 단지 갈등 없는 인간관계를 뜻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물론 평등한 인간관계, 상호존중과 민주주의는 이상사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바람직한 모습이다. 그런 꿈은,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던 공장의 쉬는 시간에 꾸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디지털 시대다. 우리는 SNS에서 투명한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또 드러낸다. 거를 것 없도록 자신을 수용하고 긍정하면서 살아야 하고, 또 이웃에게도 그래야 마땅하다. 과거에 (긍정적이든지 부정적이든지)별일이 없냐고 \"안녕하세요\"하고 묻던 인사가 \"좋아요\"로 일관된다.

SNS에는 흔히들 \"관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타인에게 자신을 공개하기 위해 자신을 착취한다. 하나의 개인(person)은 그 얼굴(face)에 달라붙은 많은 페르소나(persona)가 착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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