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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읍교회-청안교회] 선비·청교도 정신 결속, 믿음의 요새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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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원영 작성일15-02-14 15:22 조회1,5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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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공동체에서 함께 사역하신 곽철희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교회소식

충북 괴산군 청안면 옛 읍내는 참 한가했다. 지난주일 오전, 1000m 남짓 읍내길 어디를 걸어도 사람 만나기 어려웠다. 수은주까지 영하 10도로 떨어진 날이었다. 가끔 단정한 옷차림에 성경책을 끼고 종종걸음치는 이들이 눈에 띄었는데 청안교회 교인 아니면 천주교 증평 천안공소 신자들이었다. 읍내는 영화 세트장에 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단조롭고 고요했다. 청안면은 전체 인구가 3300명 정도 된다.

찬바람을 뚫고 읍내길 곳곳을 다니니 청안향교와 동헌, 청안초교 내 10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눈에 띄었다. 현대식 건축의 ‘한운사기념관’은 이채로웠다. 한운사(1923∼2009)는 한국 드라마 작가 1세대로 이곳 출신이다. 괴산군이 2013년 생가터에 기념관을 세웠다.

충북 제2의 모교회 청안교회

청안교회는 청주제일교회 다음으로 유서 깊은 충북지역 모교회다. 1907년 충북선교 개척자 민노아(F S Miller·1866∼1937) 선교사에 의해 설립됐다. 청주의 미션스쿨 일신여고 교정엔 민노아 선교기념비가 서 있다.

청안교회 대예배당에는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100여명의 교인이 모였다. 1층 주방은 예배 후 공동 식사를 위한 준비로 분주했다. 또 소예배실에선 중고등부 공과가 진행 중이었다. 주일학교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반갑게’ 들렸다.

108년 전통의 청안교회는 면 단위의 시골 교회다. 대개 시골 교회가 60대 이상 교인이 전부이기 마련인데 이 교회는 어린이, 청소년들로 활기가 넘친다. 2011년 곽철희(47) 목사가 부임한 뒤 미래세대 선교에 힘썼기 때문이다. 역사교회 전통을 이어나갈 후대인 셈이다.

곽 목사는 이날 마태복음 25장 14∼30절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기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그는 이 교회 초대 교인 박만화 여사의 신앙정신을 기리는 돌비 자구 ‘시종여일(始終如一)’ 즉,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고 한결같이’ 예수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달라고 권면했다.

박만화의 돌비는 예배당 현관을 나서면 왼쪽 정원에 위치한다. 60㎝ 높이로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교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후대가 세웠다. ‘박만화는 1911년 서울에서 청안으로 이주한 호판관 부인으로 56세에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믿음이 신실하고 교회에 물질로 봉사를 많이 하였다’(1920년 7월 14일자 기독신보)고 기록되어 있다.

청안교회 첫 예배당은 금신리 장호식씨 집에서 시작됐는데 교인이 늘자 읍내리의 민가를 매입해 그곳에서 백남익 조사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게 됐다. 이때 박 여사가 헌당 비용 3분의 2를 냈다. 또 당시 그곳 사람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근대식 난로와 괘종시계를 헌물하기도 했다.

박 여사와 영수 장호식 등의 열렬한 전도 활동으로 1920년 무렵 교인 수가 60∼70명에 달했다. 그러자 박 여사는 하나님께 감사하여 다시 성전 건축을 위해 소 한 마리와 쌀 14가마를 부지 구입비로 내놓는다. 교회 건축비 30여원, 종과 종각 건축비 30여원은 별도로 헌금했다. 1925년 ‘기독신보’는 ‘믿음 좋은 박씨’라는 제목으로 ‘박만화 여사는 70세의 노인으로 14년 전부터 주를 믿고 교회 일에 열심이던 중…수십원을 전부 부담하고 연연히 백미 5두씩 교회에 바치며 전도에 열심이므로 참 본받을 만한 부인이더라’라고 적었다.

이러한 초대 교인들의 열정적 신앙은 신문에 보도된 ‘아동성경학교’ 기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해 9월 29일자 신문은 ‘호정환 어린이가 과학과 종교라는 제목으로, 채을손 어린이가 인생관이란 제목으로 각각 열변을 토하였다’고 전했다. 때문에 교회는 부흥했고 복음은 주변 마을로 확산됐다. 괴산 사리교회 등 3개 교회가 이때 개척됐다.

1925년 성경학교 ‘과학과 종교’ 웅변

대예배와 식사 코이노니아를 마친 목양실. 장병기(76) 김충국(71) 원로장로, 정동혁(76) 은퇴장로, 김의종(58) 주행종(53) 시무장로 등이 곽 목사를 중심으로 앉았다. 그들은 서지학적 가치가 있는 여러 권의 책을 꺼내 펼쳤다. 당회록이었다. 1909∼1954년 당회록은 특히 기록유산일 정도로 가치가 있어 보였다.

‘학습문답: 리천님씨는 문답이 잘됨으로 학습인으로 세우기를 가결하다’

‘칙벌: 권중희씨는 주일을 범하여 육개월간 칙벌키로 가결하다’

‘출교: 김태희씨는 교인의 의무를 잃음으로 출교키로 가결하다’

1927년 11월 오후 5시30분 박만화씨 집에서 이뤄진 당회기록이다. 당회록을 포함한 교회 기록물 어디 하나 허투로 볼 데가 없다. ‘미시사의 즐거움’을 느낄 만큼 행간 곳곳에 영적 성장을 거듭해가는 교회 공동체의 헌신과 협력이 담겼다.

이날 모인 장로들은 ‘열변을 토한’ 아동성경학교 학생들의 후손이다. 그중 정동혁 장로의 정씨 가문은 신앙의 대물림이 어찌되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1930년대 정현호·김순경 부부와 그의 자녀 5남4녀는 프로테스탄트의 신앙과 삶을 이어갔다. 형제마다 교육자, 사업가, 사회운동가, 목회자 등으로 성장해 청안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느 8:10)’로서 기반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형제들은 특히 기독교 교육을 위해 힘썼다. 그것이 지금 교회를 품고 자리한 청안중학교(칠보학원)로 집약된다. 정씨 가문은 1950년대 “청주와 같은 도시에 학교를 세우면 큰 성공을 할 수 있을 텐데…”라는 유혹에도 “도회지 구령을 위해 선대가 지켜온 교회와 교우, 이웃을 버릴 수 없다”며 이곳에 학원을 세웠다. 54년 칠보학원과 같은 날 문교부로부터 교육기관 인가를 받았던 청주의 한 학교는 대학을 둔 규모로 성장했으나 분쟁과 탈신앙으로 지금도 내홍을 겪고 있다. 정동혁 장로는 “비록 청안 읍세는 위축되었다 하더라도 청안교회와 청안중학을 나온 이들은 크리스천 리더로 사회 곳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홈커밍데이 형식을 빌려 고향 교회와 학교를 돕고 있다.

정씨 가문처럼 청안교회 3∼6대로 잇는 교인들은 ‘작은 자’가 되기를 서원한다. 어떤 장로는 30㎝ 이상 쌓인 눈을 치우기 위해 새벽 2∼3시 나와 눈을 쓸어 새벽기도에 나오는 교인이 실족하지 않게 하고, 또 어떤 장로는 전쟁통에 없어진 종과 종탑을 세우고 365일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때맞춰 종을 쳤다. 어떤 권사는 집과 교회 사이 30리길(12㎞ 정도)을 평생 걸어다니며 오직 구주 예수만을 섬겼다. 그 권사의 아들은 지금 시무장로가 됐다. 30리길을 어머니 손 잡고 따라다녔고 한다.

선비정신,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거듭나

청안은 작은 면소재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1914년 괴산군으로 흡수되기 전까지만 해도 읍성을 갖춘 군이었다. 때문에 읍내 사람들은 선비정신이 강했다. 이 옛고을에 철도가 들어서려 하자 기차소리가 공부에 방해될 것이라며 반대하는 바람에 청안군 외곽 증평에 역이 들어섰다. 지금의 증평역과 증평군이다.

그 완고한 고장에서 초대 교인들은 박해를 이겨내고 십자가를 세웠다. 1944∼45년 일제에 의해 교회가 폐쇄됐으며 50년 한국전쟁 때 전용섭(1949∼51년 시무) 목사가 신앙을 지키려다 순교했다. 또 신사 터에 교회를 세워가며 영적 전쟁을 치렀으며, 교단 분열 영향으로 파가 나뉘어 한쪽이 천막교회 생활을 하다 서로 ‘내려놓음’으로 다시 하나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역경 극복의 배경에는 유치원과 사립 초교(옛 시온초교), 중학교 등을 세워 크리스천 리더를 키우려는 기독교 교육이 한몫했다. 유치원과 사립 초교는 읍세 약화로 폐교됐다.

청안읍성은 청빈한 선비정신이 프로테스탄트 정신으로 이어가는 믿음의 요새다. 그 읍성 안 청안교회는 하나님의 눈동자다.

곽철희 목사의 비전
다음 세대와 함께 하는 교회… ‘푸른꿈공부방’ 운영

어린이와 청소년이 귀한 면 단위 교회에 주일학교와 중고등부가 씽씽 돌아간다. 인근 한국교통대 학생들까지 청안교회를 섬긴다. 곽철희 목사 부임 당시 주일학교 학생은 10명, 중고등부 학생은 3명이었다. 이를 각각 20명, 30명 출석으로 늘렸다. 청안초교, 청안중 아이들 3분의 1이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곽 목사는 “시골 지역은 편부모와 조손가정이 많아 아이들이 방치되는 경우가 흔하다”며 “이 아이들을 위해 ‘푸른꿈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부방은 경기도 일산 기독교 대안학교 광성드림학교 교사였던 이희순(42) 사모의 역할이 컸다. 곽 목사는 “‘다음 세대와 함께하는 교회’가 목회 비전”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신대 졸업 후 서울 상도교회 부목사로 사역하다 농촌 목회의 뜻을 펼치고자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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